지난 8월 직장인 이모(40)씨는 차를 몰고 서울 장위동 한 골목길을 지나가다가 A(50)씨 차를 살짝 추돌했다. 우회전을 하던 이씨 차와 좌회전을 하던 A씨 차가 스치는 가벼운 사고였지만 A씨는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며 병원에 드러누웠다. 당황한 이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이때부터 지난한 '교통사고 처리'가 시작됐다. 약 2주간 진행된 조사 기간에 이씨는 바쁜 시간을 쪼개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비슷한 진술을 반복해야 했다. 막상 경찰 조사가 시작됐다고 해서 피해자의 태도가 달라지지도 않았다. 결국 경찰 조사는 조사대로 받고, 피해자에게 합의금은 합의금대로 물어줘야 했다. 이씨는 "이렇게 일이 복잡한데 누가 경찰에 교통사고 신고를 하려 하겠느냐"며 "앞으론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서울시 중구 종로교통정보센터에서 경찰들이 주변 주요 도로 교통 상황을 CCTV로 실시간 체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도로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중요 사고 발생 시 현장에 경찰을 출동시키는 등의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교통사고 가운데 경찰 조사가 이뤄지는 경우는 전체의 25% 수준에 불과하다. 영국·일본 같은 선진국과 달리 보험금을 신청하기 위해 경찰 조사보고서가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은 데다, 경찰의 교통사고 처리 과정이 너무 복잡해 사고 당사자들이 경찰 신고를 꺼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업무 과중을 우려한 경찰이 당사자들에게 합의를 유도해 아예 사건이 접수되지 않도록 하는 사례도 적지 않게 일어난다는 게 교통사고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때문에 '심판' 역할을 맡아야 할 경찰이 계속 사라진다는 것이다.

일선 교통경찰들은 "경찰에 정식으로 입건된 사건의 조서를 완성하는 데 물리적으로 최소 12시간 소요된다"고 말한다. 최초 사건이 발생했을 때 작성하는 '교통사고 발생보고서'를 시작으로 '교통사고 실황 조사서' '범죄 인지 보고서' '수사보고서' '수사결과보고서' '송치서' 등 갖가지 서류를 만들어야 한다. 가해자·피해자 등이 작성하는 '교통사고 관련자 진술서' '목격자 진술서'와 타(他) 기관(지방자치단체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에 보내는 공문을 빼더라도 경찰이 필수적으로 작성하는 서류만 15종, 최소 30여장에 달한다.

특히 수사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선 경찰이 현장에 직접 가서 사고 당시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데, 모든 정황이 확실해 추가로 알아봐야 할 사항이 없다고 하더라도 3시간 정도가 걸린다. 사건이 복잡하고 증거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조사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타 기관에 요청한 자료가 모두 들어올 때까지 걸리는 기간은 통상 2주 정도다.

이렇게 장시간에 걸쳐 조사가 이뤄지더라도 실익(實益)은 거의 없다. 경찰이 직접 조사하는 교통사고는 연간 22만건 수준이다. 이 중 형사처벌 대상인 무면허·음주운전·중앙선 침범 등 11개 항목에 해당하는 사건은 5만건 정도다. 나머지 17만건은 조사해봐야 현행법상 기소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공소권 없음'으로 검찰에 송치되고, 검찰 역시 처벌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하릴없이 서류를 묵히게 된다.

이 때문에 현재의 경찰 교통사고 조사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경찰력 소모를 줄이고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부분의 교통사고에 경찰 개입을 의무화하되 무의미한 서류 작업을 대폭 줄여 경찰이 효율적 '심판'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조사 담당 한 경찰 간부는 "미국의 경우 지역 경찰이 1장짜리 표준양식에 사건 개요를 체크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이 보고서가 사건 처리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장택영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경찰이 현장에서 사고를 종결 처리할 수 있게 절차를 간소화하고, 정식 입건되더라도 꼭 필요한 문서만 작성하게 하면 경찰의 '심판' 기능이 실생활에서 자리 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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