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근로정신대 할머니의 법정 피해 증언이 나왔다. 해방된 지 68년 만에 처음이다.
4일 오후 일제 강점기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열린 광주지법 204호 법정에 선 양금덕(82) 할머니는 13세 어린 나이로 일본으로 끌려가 당한 끔찍한 노동력 착취에 대해 증언했다. 할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44년 5월 일본인 교장과 헌병의 회유·협박에 못 이겨 가족과 떨어져 뱃길로 일본 시모노세키 항구에 도착했다고 한다. 당시 배에는 양 할머니를 비롯, 138명의 어린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비행기를 만드는 미쓰비시 중공업에 투입된 양 할머니는 "아침에 눈뜨면 온종일 비행기 부품의 녹을 시너와 알코올로 닦고 완성된 비행기에 페인트칠하는 일과가 반복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작은 키에 팔을 올려 페인트칠 하다 보니 눈에 페인트가 튀어 불편한 기색이라도 보이면 돌아오는 건 발길질이었다"고도 했다. 양 할머니는 그 후유증으로 수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여전히 눈과 코가 불편하다. 할머니는 "일본인들이 먹고 버린 음식 찌꺼기 통을 뒤지다가 얻어맞은 일도 있다"고도 했다.
양 할머니는 해방과 함께 1945년 10월 20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으로 끌려간 모든 여성은 '종군 위안부' '일본군의 성 노예'라는 오해를 받았다. 아버지는 화병으로 사망했고, 출가한 언니의 도움으로 21세에 선을 봐 결혼했으나 10년 만에 남편이 일본에 갔다 온 사실을 알고 집을 나갔다.
양 할머니는 1999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일본 법원에 소송을 냈으나 모두 기각됐다. 일본은 당시 근로자임을 인정해 후생연금 99엔(한국 돈 1300원가량)을 주겠다고 했다. 양 할머니 등 피해자들은 99엔을 일본 대사관 앞에 뿌렸다.
양 할머니는 "어느덧 68년이 지났다. 손해배상금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쌀 한 포대씩이라도 나눠주고, 부모님 묘에 비석을 세워 술 한잔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재판에는 원고 측의 요청에 따라 양 할머니를 비롯해 이동련(83)·박해옥(83)·김성주(84) 할머니와 김중곤(89) 할아버지 등 5명이 차례로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원고들은 미쓰비시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한 사람당 2억원씩의 위자료를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