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해야지 하면서도 미뤄온 건강검진을 이번 달에 받기로 예약했습니다. 해마다 받는 검진인데 꼭 가을·겨울에 등 떠밀리듯 하게 됩니다. 고기와 술을 곁들인 잦은 회식과 운동 부족의 결과를 마주하는 게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술 한잔'이란 시에서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 주지 않았다'며 스스로 삶을 위로했는데, 저는 가는 팔다리에 동그랗게 나온 배를 보면서 제 몸을 위로하고 싶어집니다. 네루다의 시를 조금 바꿔 표현하자면, '입사 때 26인치로 날렵하던 내 허리는 어디로 간 걸까요.'
햄버거와 스테이크를 즐기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 후 비만으로 두 번 심장수술을 받은 뒤 채식주의자가 됐답니다. 육류를 완전히 끊고 채소와 콩 위주의 식사를 하는데, 고기뿐 아니라 유제품과 계란도 먹지 않는 철저한 채식주의자인 비건(vegan)이랍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로마린다 대학이 얼마 전 7만명을 대상으로 6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 채식주의자의 사망률이 일반인보다 12% 낮았다고 합니다. 저도 요즘 채식 관련 책이 나올 때마다 자꾸 눈길이 갑니다. '채식의 시간'이란 책을 보니 고기에 입맛이 길든 이들을 달래려는 건지 볶고 지지는 채식 요리법이 많이 소개돼 있더군요.
그런데 '채식'이란 단어에는 건강을 위해 풀을 먹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지구상 어딘가에선 아직도 동물성 단백질 결핍이 문제 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채식을 소개한 책들은 먹거리가 풍요로운 선진국의 식생활을 기록하는 이중장부 같습니다. 온순한 초식동물과 다른 생명체를 공격하는 육식동물의 습성 차이가 창작의 질료로도 쓰입니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는 다른 생명을 취해 자신의 목숨을 이어가는 게 싫어 굶어 죽기를 택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 작품에서 채식은 건강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폭력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일본의 칼럼니스트 후카자와 마키(深澤眞紀)가 '남성도감'이란 책에서 처음 사용한 '초식남'도 있습니다. 여기서 초식남은 육식보다 채식을 즐기며 성격이 온순하고, 남을 눌러 승리하기보다는 타인과 조화를 추구하는 남성을 가리킵니다. 반면, 기개를 잃어버리거나 연애에 수동적인 남자를 비판하는 뜻으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채식은 어떤 의미입니까? 책 속에서 한번 찾아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