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파리특파원

지금 유럽의 정치·경제는 독일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리스 공무원 감원 규모는 아테네가 아닌 돈줄을 쥔 베를린에 물어야 한다. 지난 22일 열린 독일 총선에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선거는 언론 입장에선 아주 고약한 것이었다. 관심도와 비교해 흥행 요소가 너무 적었다.

여당인 기민당과 제1야당인 사민당의 지지율 격차는 10~15%포인트를 줄곧 유지했다. 사민당이 고소득층 증세를 이슈로 제시했지만 선거 열기를 끌어올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사민당의 페어 슈타인브뤼크 총리 후보가 한 차례 맞붙은 TV 토론도 지루했다. 난타전은 고사하고, 메르켈은 제대로 목소리 한번 높이지 않았다. 자극적 막말 정치에 익숙한 사람에겐 철 지난 통속극보다 재미없었다.

독일 총선이 싱겁게 끝난 건 메르켈의 승리가 일찌감치 예상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유로화와 시리아 파병, 복지 혜택 등 이슈가 될 만한 부분에서 두 정당 입장이 거의 비슷했기 때문인데,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서구 열강은 독일에서 히틀러 같은 강력한 권력의 출현을 원천 차단하고 싶었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소련) 등 승전국들은 전후(戰後) 독일을 동서로 나누었을 뿐 아니라 서독을 각 주(州)가 독립성을 갖는 연방제로 만들었다. 주요 정부기관도 본과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흩어 놓았다.

하원 의원은 직선제와 비례대표제로 절반씩 뽑도록 했다. 독일 국민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 선거방식 때문에 독일에선 특정 정당이 과반을 이루기 어렵게 됐다. 전후 독일(통일 전 서독)에서 한 정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것은 현재까지 1957년 기민당이 유일하다.

권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된 독일 정당은 '타협의 정치'를 하게 됐다.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선 다른 정당의 정책을 흡수하고 각료도 나누어야 했다. 2005년 집권한 메르켈은 당시 연정 파트너인 사민당에 재무장관과 외무장관 등 알짜배기 자리를 넘겼다. 눈 가리기 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권력을 나누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정당들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서로 조금씩 닮아가게 된 것이다.

타협의 정치에 익숙해진 독일 유권자는 상대를 윽박지르는 정치에 표를 주지 않았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이번 선거에서 메르켈의 압승 이유로 '조용한 정치를 원하는 유권자의 마음을 제대로 읽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요즘 언론엔 메르켈리즘(Merkelism)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즘(-ism·주의)이라는 단어는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가에게나 붙는다. 대처리즘·레이거니즘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재미있는 건 메르켈리즘은 정책이 아닌 리더십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독일 언론은 메르켈리즘을 "권력을 과시하지 않고서도 정책을 힘있게 추진하는 것"이라고 특징짓고 있다.

의원내각제인 독일과 대통령제인 우리나라의 정치 환경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 정치를 보면 독일의 경제·복지제도가 아니라 이런 정치 문화와 리더십부터 먼저 연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