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경찰 1기 1번인 이기승씨.


1971년에 전투경찰대에 전경 지원자들을 처음 배치하면서 42년 동안 실시돼 온 전투경찰(약칭 전경) 제도가 이달 25일 마지막 기수인 3211기 183명의 합동전역식을 끝으로 폐지됐다.

전투경찰 '1기 1번'인 이기승(63·제주도감사위원회 위원)씨를 만나 42년 전 입대 당시 상황과 훈련과정, 부대 배치 후 근무 등에 대한 기억을 들었다.

인터뷰 내내 이기승씨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져 나왔다.

◇첫 지원시험에 수험생들로 대학 강당 가득 차

-공개 모집을 통해 전투경찰 대원을 선발했다는데.

"1967년부터 경찰은 후방 지역의 대간첩 작전과 치안 유지를 위해 일반 경찰관으로 구성된 전투경찰대 23개 중대를 창설해 운영해 왔다. 하지만 1968년 1·21 사태로 불리는 김신조 등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과 '이승복 사건'을 일으킨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사건으로 대규모 부대가 작전에 투입됐지만 작전은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못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등 문제점이 노출됐다. 그래서 젊은 병역의무자를 전투경찰로 뽑는 전투경찰제도가 탄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전경에 지원한 동기는.

“1971년 봄에 전투경찰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우연히 봤다. 당시 제주교육대학 초등교원 양성소에 재학 중이었고, 수료를 앞두고 있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새 조직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근무지가 도심지에 있어 일반 육군 사병보다 근무여건이 좋을 것으로 판단해 지원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전경 대원을 뽑았나.

"지원자들을 학교에 모아놓고 필기 시험을 봤다. 당시 1기부터 3기까지 3개 기수가 한꺼번에 시험을 치렀다. 시험장소인 제주대학교 강당에 지원자가 꽉 들어찰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합격자 중에 입대 영장이 나오는 순서로 입대했다.

-전투경찰 1기 '1번'으로 알고 있다.

"논산훈련소에 입대하고 받은 군번은 전투경찰용 군번이 따로 있지 않고 육군 군번과 똑같았다. 1기 동기생이 500여명 가운데 내 군번이 제일 빨라 '1번'이 됐다."

-훈련과정에 얼차려나 구타는 없었나.

"당시 훈련소장이었던 정봉옥 소장이 일체의 구타와 선착순 등 체벌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정시에 취침하고 수시로 훈련병들의 소원수리를 받거나 불상사가 발생할 경우 소대장이나 조교들을 영창으로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는 "훈련소 훈련이 끝난 뒤 특별열차를 타고 부평 경찰학교로 이동해 4주간 교육을 받았다"며 "경찰학교에서의 훈련은 대만족이었다. 당시에도 2층 침대를 사용할 정도로 시설이 좋았다. 일요일에는 면회와 휴식이 보장됐다"고 말했다.

◇성산포, 추자도 등의 무장공비 추적에 동분서주

-전투경찰 복무는 어디에서 했나.

"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때 희망근무지를 써냈다. 당연히 고향인 제주로 지원했다. 제주출신 동기생 3명과 외지 출신 동기생 4명 등 7명이 제주 전투경찰부대에 배정됐다. 병력 인수자로 부평으로 온 제주경찰국 소속 경찰관을 따라 열차와 배를 타고 제주도로 이동해 제주지역 유일한 전투경찰대인 121전투경찰대에 배치됐다."

전투경찰 1기 1번인 이기승씨.

-자대 배치후 어떤 보직을 맡았나.

“당시 제주에는 121 부대를 중심으로 서귀포시 성산포에 1파견대, 제주시 한림에 2파견대(각 1개 소대씩)가 있었다. 본부 중대격인 121대 부대에서 보급 행정과 인사·서무·감찰 역을 맡았다.”

-당시 제주공항에 전투경찰대가 처음 신설됐다고 하던데

“제주국제공항 경비대를 창설 임무를 맡고, 임시방편으로 미군이 사용했던 둥근 모양의 임시 막사를 사용해 내무반과 취사반 2곳을 지었다. 경찰 트럭 1대를 배정받아 순찰용 차량으로 사용했다. 공항 경계 철조망을 따라 내각 순찰로를 다지고, 공항을 돌면서 공항 지도에 붓뚜겅으로 초소 위치를 찍으면서 외곽 경계 초소를 세웠다.  당시 세운 초소 대부분이 현재도 초소로 사용되고 있다. 또 우물을 파고 오리 새끼 1000마리를 짬밥을 먹이며 키워 급식용으로 먹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 제주에서도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벌어졌다는데.

“공항경비대에서 근무할 때, 밤 12시쯤 경보가 울렸다. 처음에는 연습인 줄 알았는데 완전무장을 하고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추운 겨울에 트럭을 타고 평소에 1시간 넘는 거리인 성산포까지를 30분만에 주파했다. 엄청 추웠다. 총에 맞은 우도주민이 들 것에 실려나오는 모습을 보고 실제 상황임을 알았다. 당시 병력이 투입돼 무장공비를 찾았지만 이미 도주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음 날부터 우도를 샅샅이 뒤져 고정간첩을 체포했다.

◇시위 진압에 투입 안됐다면 '국민 부대'로 남았을 것

그는 ”추자도에서도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그 때는 뱃길로 3시간 넘는 거리라 직접 출동을 하지는 못했다. 수상한 외부인을 목격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검문 과정에서 무장공비들이 도주했다. 당시 방위병들이 뒤쫓아갔지만 소총 잠금장치를 풀지 못해 사격을 못했다. 무장공비 체포과정에서 수류탄이 터져 우리 경찰관과 무장공비가 숨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전투경찰 제도가 폐지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대간첩 작전이 아닌 시위진압으로 수행업무가 변질이 되면서 전투경찰이 민주화세력을 탄압하는 세력으로 부각됐다. 또 현장에는 항상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전투경찰 지망자가 급격히 줄었고, 부대원을 충당하기 위해 강제 징집이 이뤄졌다. 그 과정에 전투경찰에 대한 자긍심이 사라졌다. 당초 목적처럼 대간첩 작전을 수행하는 부대로 유지됐다면 비난의 대상이 아닌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부대로 남아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주 출신인 이기승 제주도 감사위원은 2009년 10월 연합뉴스 편집국 부국장으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언론인으로 30여 년 동안 근무했다. 2009년 10월 제주도감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제주도 전투경찰 전우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았던 이기승 위원은 지난해 전국 조직으로 결성된 대한민국 전·의경회 결성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서울에 상주하는 초대 회장직 제안을 받았지만 제주에서 생활하는 여건상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그는 “전의경동호회가 해병전우회처럼 응집력을 갖춰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모임으로 활성화되는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