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혁 특파원

지난 21일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인근의 유명 관광지 세고비아. 점심시간이 한창인 식당가는 여름휴가의 막바지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부분 미국, 북유럽에서 온 관광객이고 중국인 단체 관광객도 자주 눈에 띄었다. 종업원들은 분주히 오가며 주문을 받았다. 여름 내내 이곳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다는 글로리아(21)는 "4개월이나 한곳에서 계속 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올해는 외국인들이 우릴 먹여 살리고 있다"고 했다. 마드리드의 부촌(富村) 살라망카 명품 거리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매장마다 영어, 프랑스어, 독어를 유창하게 하는 종업원들이 관광객들을 맞았다.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스페인, 관광 특수로 한숨 돌려

올여름 관광업계가 '대박'을 치며 스페인 정부가 오랜만에 웃음 짓고 있다. 올 상반기 스페인을 방문한 관광객은 총 3400만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가량 늘었다. 관광 수익은 244억유로(약 36조3000억원)로 6.6% 증가했다. 스페인관광청 통계에 따르면 7월 한 달에만 790만명이 스페인을 찾아, 1995년 이후 한 달 최다 관광객 수를 경신했다. 관광업계에서 스페인의 라이벌인 이집트와 터키가 정정 불안으로 인기가 시들해진 덕분에 반사이익을 본 것이다. 올해 외국인 관광객 수가 위기 직전 피크였던 5870만명을 돌파해 6000만명을 넘길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관광뿐 아니라, 경기 하락으로 집값과 생활비가 저렴해진 틈을 타 아예 스페인에 정착하는 외국인도 늘었다. 주로 따듯한 날씨와 한적한 생활을 찾아온 북부 유럽인이다. 유럽통계청(Eurostat)에 따르면 스페인에 거주하는 독일인은 2008년 13만명에서 현재 20만명으로, 영국인은 35만명에서 40만명으로 각각 증가했다.

블룸버그

연일 마이너스 성장과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던 스페인 정부는 이번 특수를 발판 삼아 부진을 탈출한다는 계획이다. 관광산업이 스페인 국내총생산(GDP)의 10%, 고용의 11%를 차지하는 만큼 전체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올 2분기 성장이 -0.1%로 1분기(-0.4%)보다 제법 나아졌고, 경기 선행지표인 제조업관리자지수(PMI)도 30개월 만에 처음 상승하며 기대는 더 커지고 있다.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는 지난달 스페인의 2분기 성장률 발표 직후 "수출 확대와 관광산업 호황으로 3분기부터 스페인 경제가 성장세로 반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건설 등 주력 산업은 전망 어두워

전문가들은 아직 조심스러운 반응이다. 하비에르 히메네스 IESE 경영대학원 교수는 "경제의 수축이 끝났다고 해서 '터널의 끝'을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경기가 2008년 이전 수준을 회복하려면 적어도 8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여전히 올해 스페인의 GDP가 1.5%~1.6%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관광산업의 호조도 일시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관광 경쟁국인 이집트와 터키가 정정 불안을 해소하면 언제든 다시 관광객을 빼앗아갈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더구나 금융 위기 이전 스페인 경제를 이끌어온 주축 산업들이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다. 한때 스페인 GDP의 13%를 차지했던 건설업이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아 관련 업계도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 영국 경제경영연구센터(CEBR)는 스페인 건설업의 몰락이 직간접적으로 양산한 실업자는 470만명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페데리코 스테인베르그 왕립전략연구소 연구원은 스페인이 "경제지표상 회복에 들어간다 해도 실물경제의 빠른 회복을 기대하긴 어렵다"고 했다.

"난 3개 국어를 할 수 있는데… 이력서는 800번 넘게 썼어요
피자집 종업원 자리 떨어진 후 더 이상 스페인에 살기 싫었죠"

일자리 찾아서 유럽·캐나다… 北아프리카 모로코까지 나가

전 세계 관광객들이 스페인으로 모여드는 것과 대조적으로,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스페인 청년이 늘어나고 있다.

스페인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에만 30세 이하 스페인 청년 28만명이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떠났다. 이들은 특히 실업률이 낮고 연봉이 높은 독일을 선호하며, 같은 언어권인 남미 국가도 인기가 높은 편으로 나타났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직업소개소 앞에 아침 일찍부터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스페인 대도시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3개 국어를 할 수 있다는 다비드(30)는 직장을 구하려고 800번 넘게 이력서를 냈다. 피자집 종업원에 지원했다가 떨어지자 더 이상 스페인에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결국 바다 건너 캐나다에서 직장을 구한 그는 "계속 취업에 실패하니 난 쓸모없는 존재란 생각이 커져서 견디기 힘들었다"고 현지 언론에 털어놓았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유럽과 미주를 넘어 북아프리카 모로코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스페인 청년도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모로코에서 건축 일을 하는 스페인 청년은 "최소한 여기선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이 있다"고 말했다. 바르셀로나대 사회학과 알무데나 모레노 교수는 "경제 위기의 최대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로 전락한 청년들"이라고 진단했다. 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페인 청년 구직자의 68%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스페인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업률에 따른 젊은이들의 대규모 국외 이주를 두고 스페인 사회의 의견은 둘로 갈린다. 일각에서는 스페인의 우수한 인재들을 외국에 빼앗긴다며 '두뇌 유출(brain drain)'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반면 "젊은 세대가 외국에서 수준 높은 기술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며 '두뇌 훈련'의 기회로 보는 시각도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