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정치 담당 에디터 겸 부국장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문제는 조선일보가 청와대와 국정원으로부터 자료를 건네받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제법 많다.

국회 상임위별로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정해져 있듯이 언론사 부서들도 정부 부처를 나눠 맡는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정치부가 관할한다. 소문대로 청와대와 국정원이 조선일보에 '채동욱 자료'를 넘겼다면 정치부가 통로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조선일보 정치부장은 보도 전날 밤 10시 무렵에야 관련 내용을 처음 알았다. 정치 담당 에디터인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일보가 회사 차원에서 박근혜 정부와 물밑 거래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돈다. 조선일보 사옥은 7층 건물이다. 신문을 제작하는 편집국은 3층과 4층에 있고, 사장·발행인·주필 집무실은 6층에 있다. 조선일보 사람들에게 '6층'은 고위층을 지칭하는 은어다. 6층 관계자들은 채동욱 총장 혼외 아들 의혹을 일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침 신문을 통해 접했다. 조선일보·박근혜 정부 밀약설이 사실이라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채동욱 검찰총장 사퇴는 완벽한 사전(事前)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일보가 보도로 의혹을 띄운 뒤 법무부가 감찰 지시로 마무리를 짓는다는 스케줄이 진작에 마련됐다는 뜻이다. 조선일보는 지난 13일 법무장관의 감찰 지시 사실을 다른 언론사들과 마찬가지로 법무부가 출입 기자들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통해 접했다.

조선일보가 '혼외 아들'의 출국 날짜 및 학적부 기록을 보도한 것은 정보 당국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문제 제기도 있었다. 필자도 그 부분이 찜찜하고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취재 기자들에게 확인해 봤다. 취재원 보호를 위해 구체적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혼외 아들' 주변 취재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취득할 수 있는 정보였다. 이번 보도는 세간의 의혹처럼 조선일보와 박근혜 정부 고위 인사들 간의 고공(高空) 플레이가 아니라, 취재 기자들이 몇 주일 동안 구석구석 파헤친 보병(步兵)전의 결과물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조선일보 특종 보도가 나올 때마다 조선일보와 정권 간의 뒷거래 음모설이 불거지곤 한다. 그중 몇 건은 필자가 취재 과정에 직·간접으로 참여해 내막을 알고 있다.

1999년 5월 23일 저녁, 조선일보는 정치부를 중심으로 기자 50여명으로 야간 취재에 돌입했다. 다음 날로 예정된 김대중 정부 2기 개각 내용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청와대 출입 기자가 3배수가량 추려 놓은 명단에 따라 모든 후보자 집을 방문해 대면(對面) 취재를 했다. 필자도 재경부 장관 후보 중 한 명의 집 앞에서 새벽 1시까지 '뻗치기'를 했다. 1기 개각 때 철통 보안(保安)으로 인사 예측 기사가 어긋났던 터라 취재 경쟁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노 마크 상황에서 확인된 내용들이 본사로 중계되면서 조각조각 퍼즐이 맞춰졌다. 조선일보 5월 24일자는 국정원장과 14개 부처 기관장 개각 내용을 거의 완벽하게 특종 보도했다. 한동안 정치권 주변에선 김대중 정부 고위 관계자가 명단 전체를 조선일보사 팩스에 밀어 넣어 줬다는 소문이 정설(定說)처럼 돌아다녔다.

2003년 1월 7일 오후, 노무현 정부 인수위를 취재하던 조선일보 기자가 "문희상 의원이 노 당선자 집무실에 다녀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문 의원은 초대 비서실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노무현 정부 인사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 만한 핵심 관계자들을 한 명 한 명 접촉해 유도성 질문을 던지며 취재했다. 누구 하나 속 시원한 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의 머뭇거림 속에 결정적인 단서들이 숨어있었다. 자정 무렵 취재 내용이 정확하다는 확신을 갖고 시내판 기사에 노무현 정부 첫 비서실장, 정무수석 이름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노 정부 핵심 인사가 조선일보와 내통했다는 음모설이 제기됐고 친노(親盧) 사이트엔 혐의자 명단이 오르내렸다.

조선일보의 김대중·노무현 정부 인사 특종 기사는 정권이 흘려준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핵심적 위치에 있던 야당 사람들이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고 가는 정권들과 뒷거래를 했다면 오늘날의 조선일보는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원칙이 박근혜 정부 때라고 해서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