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0월 17일 새벽 5시 10분쯤 대구 구마고속도로 위에서 한 여대생이 23t 화물차량에 치여 숨졌다.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됐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시신의 위아래 속옷이 없었다. 전날 밤 10시 40분쯤 대학축제 주막촌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캠퍼스를 떠난 후 연락이 끊긴 계명대 간호학과 1학년 정은희(당시 18세)양이었다.

당시 경찰은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해 사건을 종결했지만, 유족들은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정은희양 사건'으로 조금씩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내 영구 미제사건으로 분류돼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다.

"죽을 때까지 딸 억울함 밝힐 것"… 15년 전인 1998년 대구의 고속도로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정은희양의 사진이 담긴 휴대전화를 아버지 정현조(67)씨가 살펴보고 있다. 당시 경찰은 정양의 죽음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지만, 아버지 정씨는 생업을 전폐하고 사건을 파고들어 재수사를 이끌어내고, 딸이 사망 전 스리랑카인 3명에게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검찰이 밝혀낼 수 있게 했다.

"몹쓸 짓을 한 게 스리랑카 놈들이라고? 죽인 놈은 못 찾았다고? (그동안) 그렇게 단순 교통사고라고 우기더니…."

지난 4일 오후 은희양 유족들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검찰이 "은희양이 숨지기 전 성폭행한 범인들을 검거했다"고 연락해온 것이다. 이날 대구 중구 남산동 자택에서 만난 아버지 정현조(67)씨는 분한 숨을 몰아쉬었다. "15년을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살았다"며 "지금이라도 일부를 밝혀준 검찰이 고맙지만, 이번 수사가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청와대부터 법무부·검찰·경찰·언론에까지 진정·탄원·고소·고발 등 안 해본 게 없습니다. 15년 동안 가는 곳마다 외면당한 악성 민원인이었죠."

아버지 정씨는 딸의 죽음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딸은 학교에서 집과 반대 방향으로 7.7㎞나 떨어진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다가 트럭에 치였다. 더구나 숨진 딸의 속옷이 사고 현장에서 30m 떨어진 풀숲에서 발견됐는데도 사건은 단순 교통사고로 마무리됐다. 경찰은 당시 "이게 딸 속옷 맞느냐"며 증거물로 받아주지조차 않았다.

답답했던 정씨는 2000년 9월 담당 형사를 직무유기로 고소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그가 직접 소장을 쓰고 제출했다. 항고·재항고·헌법소원까지 했다. 정씨는 "속옷에서 딸 혈흔과 정액 반응까지 나왔는데도 경찰은 우리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다"며 "누구도 못 믿을 상황이어서 직접 범인을 찾아나서야 했다"고 말했다.

생계 수단이었던 채소 장사는 진작에 접었다. 목격자를 찾기 위해 뿌린 전단만 수만장이 넘었고,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전신주에 걸었던 플래카드만 수백장이다. 3년 전부터는 숨진 딸 방에 컴퓨터를 들여놓고 인터넷을 배워 추모 사이트를 운영하고, 곳곳에 도움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법전도 사서 공부했다. 한 작가의 도움을 받아 딸의 사건을 재구성한 소설도 쓰고 있다. 2평 남짓한 은희양의 방은 사건 관련 서류 박스들로 꽉 차 있다.

정씨는 지난 5월 검찰에 또 고소장을 냈다. 대구지검 형사1부(부장 이형택)는 2010년 DNA법(강력범죄자의 DNA를 채취해 보관하도록 하는 법률)이 제정된 것에 가능성을 두고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과 경찰의 DNA 자료를 뒤져 15년 전 정양 속옷에서 채취한 DNA와 일치하는 DNA가 2011년 채취된 사실을 확인했다. 여고생에게 성매매를 권유하다가 붙잡힌 스리랑카인 A(46)씨였다. 검찰은 3개월여 동안 수사를 벌여, 15년 전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한 A씨 등 스리랑카인 3명이 술에 취한 정양을 고속도로 부근으로 끌고 가 집단 성폭행한 사실을 밝혀내고 A씨를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이미 스리랑카로 귀국한 2명도 공조수사를 통해 검거할 계획이다. 이들 범죄의 공소시효는 당시 법률로는 다음 달 16일까지인 15년이지만, DNA법이 생기면서 10년이 늘었다.

"성폭행범은 잡혔다지만 딸이 왜 교통사고를 당했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잖아요." 정씨는 "법에는 공소시효가 있을지 몰라도 내 가슴속엔 시효가 없다. 죽을 때까지 딸의 억울함을 밝힐 것"이라며 딸 사진이 담긴 휴대전화를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