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카, 웃는 모습 처음 본다. 앞으로도 이렇게 웃으며 살아야 해."

지난 16일 서울 동국대 교정에서 열린 졸업식. '삼촌' 김명규(47)씨가 학사모를 쓴 노미란(25)씨 어깨를 다독였다.

서울 마포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김씨와 대학생 미란씨는 20년 전인 1993년 삼촌과 조카 인연을 맺었다. 그해 다섯 살이던 미란씨는 가스 폭발로 어머니를 잃었다. 미란씨는 팔과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고, 동생 미진(23)씨도 얼굴과 양손을 다쳤다.

이후 어린 미란씨는 아버지(노재완·56)가 운영하는 구멍가게에서 일을 돕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가게에 계시니까 집안일은 모두 제 몫이었죠. 저보다 어린 미진이도 돌봐야 했고요. 가족 몰래 운 날이 셀 수 없이 많은, 밤 같이 어두운 나날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미란씨 얼굴에 그늘이 졌다.

2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국민권익위원회 건물 뒤편에서 의조카·의삼촌 관계의 동국대 졸업생 노미란(왼쪽)씨와 마포장애인종합복지관 사무국장 김명규씨가 마주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이듬해 여름 우연히 미란씨네 구멍가게를 찾은 김씨는 자꾸 구석으로 숨어 들어가려는 어린 자매를 봤다. 자매가 상처 때문에 자꾸만 뒤로 숨는 게 유독 마음에 걸렸던 김씨는 이때부터 수시로 구멍가게를 찾아 자매와 친해지려 노력했다. 처음엔 경계하던 자매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김씨는 학업과 집안 살림, 가게 일까지 싹싹하게 해내는 미란씨를 위해 집안일을 도와줄 가정봉사원과 공부를 도와줄 대학생 봉사단도 소개해줬다. 이 일을 계기로 아버지 노씨와는 의(義)형제를 맺었고 자매에겐 의삼촌이 돼줬다.

'이 아이들을 부디 수술해 주십시오. 분명히 사회에 공헌할 아이들입니다. 제가 반드시 그렇게 성장시키겠습니다.'

김씨는 1995년부터 전국 대형 병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병원장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남겼다. 자매의 몸 곳곳에 남은 화상 흔적이 자꾸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매를 위해 애쓰는 김씨의 모습은 병원을 움직였다. 동생 미진씨는 1997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얼굴과 양손을 무료로 치료받았고, 2011년엔 언니도 팔·다리 성형수술을 두 차례 받았다.

졸업식 날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미란씨는 "수술 전까지는 긴 바지만 입었는데 삼촌 덕에 예쁜 치마도 마음껏 입을 수 있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미란씨는 김씨의 도움 덕에 특목고에 진학할 정도로 성적도 우수했다. 동국대 전자공학과에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던 그는 작년 3월 유명 대기업에 입사했다. 동생 미진씨도 어엿한 대학생으로 성장, 공간연출가의 꿈을 키우고 있다.

이날 미란씨 가족은 다 함께 외식을 했다. 20년 전 사고 이후 아버지와 자매가 같이 외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눈물 때문에 밥을 삼키기 어려워하던 미란씨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삼촌 덕분이에요.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었죠. 고맙습니다 삼촌." 김씨는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