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 달린 아이스케이크가 한여름 상품으로 본격 등장한 건 1930년대 초반이다. 아이스크림보다 늦다. 당시 조선일보를 보면, 아이스케이크가 1933년 나왔으며 1935년 여름에는 경성의 판매상이 1500명가량으로 갑자기 늘어나 큰 돈벌이를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1935년 7월 19일자).

군소 업자들이 제조해 행상과 노점을 통해 팔던 아이스케이크는 신문에 광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38년 1월 중순부터 '아이쓰케키'라는 글자가 조선일보 광고란에 계속 등장한다. 아이스케이크 제조기 회사의 광고였다. 조선냉동공업소, 국익(國益)냉동기 등 너댓 군데 업체들은 전기 냉동 장치로 아이스케이크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계를 선보이며 '한 밑천 잡아보라'고 자영업자들을 유혹했다(1938년 1월 17일, 2월 14일, 2월 23일, 3월 6일자). 얼음에 소금을 버무려 물을 얼리는 수공업적 제조법에 맞서는 '신기술 신상품' 광고였다.

바람 쌀쌀하던 2월에 등장한 아이스케이크 제조기 광고. ‘ 여름 한철 장사로 순수익 3000원(약 6000만원)’이라고 제목을 붙였다(조선일보 1938년 2월 23일자).

하필이면 1938년 초에 아이스케이크 제조기 광고가 잇따랐을까. 그 전해인 1937년이 무척 더웠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엔 '금년(1937년)은 례년에 보지 못하든 더위가 오래 동안 계속하야 여름 장사들이 두둑히 한목' 보았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고객의 수효를 만히 가진 아이스케익 장사들 중에는 백 개 혹은 이백 개식 도매로 사서 자전거 행상을 하는 소매업자에게 팔기'도 했다는 것(1937년 8월 21일자). 업체들은 아이스케이크 제조기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것처럼 광고했다. 광고엔 '돈버리의 왕'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곡물팽창기(뻥튀기 기계)'와 똑같은 캐치프레이즈다. 조선냉동은 아이스케이크 장사로 얻는 수입을 '일하(一夏·여름 한철)의 이익 5000원(약 1억원)'이라고 했고, 국익냉동은 '순익(純益) 3000원'이라고 광고했다(1938년 2월 14일, 2월 23일자).

하지만 빙과 장사가 그리 순탄한 건 아니었다. 비위생적 제품들이 일으키는 사고 때문에 종종 당국의 철퇴를 맞았다. 여름철 전염병 입원 환자의 감염 경로 1위가 아이스케이크로 나왔고, 아이스케이크 1㎤에 청계천 물보다 많은 730만마리의 세균이 검출되기도 했다(1935년 7월 16일자, 1939년 7월 27일자). 1935년엔 아이스케이크 행상과 노점이 전면 금지됐지만 행상들은 경찰과 숨바꼭질해 가며 계속 팔았다(1935년 7월 19일자, 1937년 4월 11일자). '여름이 되면 거리마다 나타나는 여름의 총아'라는 아이스케이크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1938년 7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