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수요집회'는 몇 번째인가?

"1088회였다. 22년이 됐다."

―이렇게 오랜 세월 집회를 끌고 가니, 당신은 보통 끈기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오래갈 줄은 나도 몰랐다. 한 할머니는 '처음 시작할 때 미향이는 아가씨였는데 아줌마가 됐고, 나는 아줌마였는데 꼬부랑 할머니가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온 것은 일본의 태도 때문이었다."

윤미향 대표는“처음 위안부 할머니들은 광목천 피켓으로 얼굴을 가리고 시위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모자를 눌러썼다”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윤미향(49)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상임대표는 사진에서 보던 모습보다 작았다. 그녀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처음 열린 1992년 1월 18일부터 일본대사관 앞에 있었다.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총리가 방한했을 때 항의 차원에서 시작했다. 그날이 수요일이었다. 우리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수요일마다 계속 집회를 열자고 했던 것이다."

―그때 위안부 할머니들은 몇명 참석했나?

"처음에는 여성 단체 활동가들만 집회에 참석했다. 위안부 할머니 한 분이 처음 공개석상에 선 것은 그해 8월 14일이었다. 이분이 고(故) 김학순 할머니였다."

―여자로서는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과거였을 텐데.

"그 순간을 떠올리면 처음 문을 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율을 느낀다. 어려운 요청이었는데 이분은 선뜻 공개 증언을 받아들였다. '당한 것만 해도 치가 떨리는데 일본 정부가 그런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발뺌하는 게 너무 기막혀서 그랬다'고 말했다. 그동안 숨겨졌고 은폐됐던 위안부 문제가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날을 '위안부 기림일'로 정했다."

―초기에 위안부 할머니의 소재를 어떻게 파악했나?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 접수를 받겠다고 알렸을 때 누구도 자신이 피해자라고 신고하진 않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운을 뗐다. 주위에서 알까 봐 몸을 사렸다. 처음에 우리는 다섯 분의 할머니를 각각 만났다. 이분들은 자기만 혼자 살아남아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당시까지 위안부 생존자가 매스컴에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을 어떻게 설득해서 '수요집회'에 나오게 했나?

"우리가 나서야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하고 배상할 것이라고 했다."

―집회에 나온 할머니에 대한 우리의 시선도 호의적이지만은 않았을 텐데.

"처음 할머니들은 광목 천 피켓으로 얼굴을 가리고 시위했다. 취재진이 카메라를 들이대면 모자를 눌러썼다. 행인들은 손가락질하며 '부끄러운 짓을 당해놓고도 데모하느냐'고 내뱉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이럴까. 내 몸이 그때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신도 부끄럽고 움츠러들었는가?

"나는 만 스물일곱이었다. 메가폰과 시위용품을 들고 할머니 곁에 서 있었다. 나는 당당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장에서는 가끔 주눅이 들었다. 내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으니 할머니들은 어땠을까. 그럼에도 할머니들은 매주 참석했다. 이분들을 통해 내가 용기를 얻기도 했다."

―정신적 상처가 있는 이들과 함께 지내면 용기를 얻는 일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

"솔직히 그랬다. 이분들은 험난하게 세상을 살아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믿으면 안 된다는 피해 의식을 갖고 있다. 가령 할머니가 갖고 있는 머리 빗을 보고 '아주 예쁘다'고 말하면 안 된다. 자기 것을 탐내 훔쳐갈 것으로 의심한다. 우리가 운영하는 '쉼터'에 위안부 할머니 세 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할머니 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들을 돕고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도, 본능적인 경계와 피해 의식은 어쩌지 못하는 것 같았다."

―1998년 한 위안부 할머니가 당신을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고 이로 인해 환멸을 느껴 '정대협'을 4년간 떠났다고 들었다.

"어느 날 젊은 여자가 나타나 자기들을 위한 운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이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겠나. 저 여자가 나를 팔아서 또 무슨 돈벌이를 하려는가 했을 것이다. 이분들이 가장 공격하기 쉬운 대상도 우리였다. 초기에는 마음에 안 맞으면 우리에게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나?

"한 할머니가 '우리 이름을 팔아서 번 돈으로 용산역 앞에 3층짜리 빌딩을 사뒀다'고 고소했다.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보니, 고소장에 서명한 할머니가 8명이나 됐다. 그 뒤로는 이분들과 눈을 맞추고 못 보겠더라. 나는 어린 딸도 제대로 못 돌보면서 이분들을 위해 일했다. 인간에 대한 환멸까지는 아니어도 배신감으로 우울증에 걸렸다.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더 이상 이분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죽을 것 같다'며 나왔다. 그 뒤 정대협 관계자들이 업무 문제로 전화를 걸어오면 '당분간 내게는 전화하지 마라'고도 했다. 나이가 먹어가고 세월 속에서 스스로 치유를 하면서 다시 돌아왔다."

―삶에서 중시하는 가치라는 게 있다. 가정을 뒷전에 두고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헌신하는 당신의 심리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공명심인가?

"…신앙 같은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내 꿈은 목회자였다. 한신대 신학과를 나와 이화여대 대학원(기독교교육)에 다니면서 교회여성단체에서 일했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기생관광' 실태를 접한 뒤 현장에 데모를 나가면서 '정대협' 간사 직을 맡게 됐다. 비록 목회자의 길로는 못 갔지만, 그런 마음으로 일했던 것 같다."

―남편이 '남매 간첩사건(1993년)'의 당사자였다고 들었다.

"결혼한 해 남편이 간첩 혐의로 체포돼 4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당시 나는 임신한 몸으로 수요집회를 진행하면서 남편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 사건은 안기부 프락치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대한변협과 국회진상조사위원회에서 밝혀졌다."

―남편은 대학 시절 함께 '운동'을 했던 사이였나?

"아니다. '수요집회'를 시작할 때 남자 참가자들이 없었다. 당시 일본 군부가 위안부에게 나눠줬던 콘돔인 '돌격 1번(突擊 一番)' 사진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한 젊은 남자가 그 사진을 보고 찾아왔다며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 남편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

"남편은 지금은 해체된 '반핵평화운동연합'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이는 '수요집회'에서 나와 교대로 메가폰을 잡았다. 할머니들이 '둘이 결혼하면 좋겠구먼' 하며 바람을 잡았다. 할머니들이 중매를 선 셈이다. 일년 만에 결혼했으니까. 지금은 경기도 수원에서 지역신문사를 하고 있다."

―'수요집회'는 22년이 흘러도 아직 종착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일본의 사과와 배상은 못 받아냈지만, 우리 정부가 법을 만들어 경제적인 보상을 해줬다. 무엇보다도 할머니들이 자신은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또 집회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가는 측면도 있었다."

―얼마 전 일본 정부는 '책임 인정과는 별개로 원하면 개별적으로 보상은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작년 3월 한 할머니는 '우리는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공식 사과, 법적 배상이다. 배상금을 받으면 10원도 나를 위해 쓰지 않겠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세계의 여성과 아동을 위해 쓰겠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나 극우단체에서는 "위안부는 돈벌이를 위해 자원해 매춘했다"고 주장하는데.

"위안부는 일본 군인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국가 정책으로 입안·기획·모집한 것이었다. 당시 문서와 기록에는 '조선에서 건너온 여성들은 천황의 하사품이었다' '사병들 배설을 위한 공중변소였다'는 문구도 나온다."

―일본 정부는 국가적 개입을 부인하고 민간업자에 의해 운영됐다고 하지 않는가?

"민간업자가 운영한 '위안소'도 있었다. 하지만 관리와 통제는 일본 군부가 했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은 있다."

―일본의 한 각료는 "미국도 전쟁에서 현지 여성에 대한 매춘과 강간이 있었고, 한국도 베트남전에서 그랬다. 뭐 다를 게 있느냐"고 말한 적 있다.

"어느 전쟁에서도 군인 개인 혹은 집단에 의해 성범죄가 자행돼왔다. 미국이나 우리도 이런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군인 위안용'을 내세워 조직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부인하는 일본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작년에 일본의 한 극우단체 회원이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앞 하수구에 막대기를 하나 끼워놓고 갔다. 박물관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하수구라니, 얼마나 비굴한 일본의 모습인가. 매스컴에서는 이를 '말뚝 테러'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김복동 할머니가 '작대기를 꽂은 놈아 고맙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박물관이 어디 있는 줄 몰랐을 텐데 네놈 때문에 잘 알려졌다'고 말했다. 일본을 상대하는 데는 이런 여유가 필요하다."

아베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런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아베는 갈 데까지 갔다. 일본 정부의 본심을 세상에 다 보여줬다. 그러면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일본이 원하는 바다. 일본 정부는 우리를 자극해서 갈등과 분쟁을 만들고 싶어한다. 이를 빌미로 자신의 국민을 뭉치게 하려는 것이다. 일본이 자극할 때 우리가 응수하지 않으면 사그라든다."

―응수하지 않으면?

"근본을 해결해야 한다. 과거 진상 조사와 자료를 구축하고, 국제사회와 연대를 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의 학교에서는 '홀로코스트(세계 2차 대전 때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가르친다. '홀로코스트'가 있던 시기에 '일본군 위안부 참상'도 있었다는 걸 교과서에 포함시키도록 해야 한다. 일본 정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게 해답이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결국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사과하게 될 것이다."

―'수요집회'를 해온 당신의 경제적 생활은 어떠했나?

"처음 내가 간사였을 때 봉급 30만~50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도 저금했고 지금도 저금하고 있다. 내 인세와 강연료는 모두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기부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부자고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행복하게 했나?

"할머니들이 2004년 미국의 한 대학에 초청받았다. 그 자리에서 '악몽 같은 일을 겪고도 어떻게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느냐'는 한 학생의 질문에 할머니가 나를 가리키며 "저기 젊은 여성이 내가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게 나의 보상이었다. 지금 나를 인터뷰해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닌가."

현재 국내에는 위안부 할머니 57명이 생존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