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이탈리아·프랑스의 유서 깊은 명품의 시작이 그렇듯, 구찌 역시 그 출발엔 마구(馬具)가 있었다. 창립자 구치오 구치(Guccio Gucci)는 188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사보이 호텔의 말단 사원부터 시작해 지배인까지 올라갔으나, 1921년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죽으로 만드는 마구 제품 가게를 열었다. 지금도 구찌 제품에 말과 관련된 장식이 빠짐없이 들어가는 이유다.
구찌의 대표적 구두 '호스빗 로퍼'도 마찬가지다. 호스빗(Horsebit)은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을 뜻한다. 구치오 구치와 그 아들들은 그 재갈 모양을 본뜬 날렵한 금속 장식을 고안해냈고, 이 장식은 90년 넘게 구찌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쓰였다. 이 장식을 신발에 처음 적용한 건 1953년. '호스빗 로퍼'는 그렇게 탄생했다.
◇60년 역사, 호스빗 로퍼
호스빗 로퍼는 틀이 딱딱하게 잡히지 않아 부드러운 감촉을 자랑하는 '모카신(moccasin)'의 일종이다. 광택이 있는 가죽, 스웨이드 같은 소재로 주로 만든다.
남다른 점은 '튜뷸러 구조'로 신발을 완성한다는 것. 튜뷸러(tubular)는 관(管)이라는 뜻이다. 대개 신발은 안창과 밑창, 덮개용으로 재단한 가죽을 바느질로 연결해서 만들지만, 호스빗 로퍼는 가죽 한 장을 통째로 접고 기워 만든다. 가죽 조각을 따로따로 잘라 연결하지 않은 데다 안창을 따로 박지 않은 덕에 신발은 대단히 가볍고 유연하다. 마치 양말을 신는 것처럼 편안한 것이 특징이다.
독특한 디자인과 편안한 착용감 덕분에 호스빗 로퍼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곧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할리우드 스타들이 이 신발을 애용했다. 영화감독 프랜시스 코폴라, 배우 클라크 게이블, 존 웨인, 더스틴 호프먼 등이 즐겨 신었다. 1985년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마련한 '패션 명예의 전당'에 선정돼 영구 전시되기도 했다.
◇2013년에 만나는 '1953컬렉션'
프리다 지아니니는 구찌가 남긴 이 독창적인 유산(遺産)을 기념하기 위해 올해 새롭게 '1953컬렉션'을 선보였다. 호스빗 로퍼의 모양은 그대로 살렸고, 모든 신발마다 '1953년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구찌의 제품(Gucci 1953 Made in Italy)'이라고 필기체로 새겨넣어 역사성을 강조했다.
대신 소재와 빛깔은 한층 더 과감해졌다. 광택이 감도는 가죽과 스웨이드는 물론이고, 악어·뱀피, 구찌 특유의 플로라 무늬가 새겨진 캔버스 소재로도 호스빗 로퍼를 만들어 내놓는다. 구두 윗부분과 가장자리, 뒷부분이 금속 징으로 뒤덮인 제품도 있다.
호스빗 로퍼는 편안하고 느슨한 평상복에 어울리는 신발이다. 언제 어디서나 부담 없이 신을 수 있는 이 신발의 매력에 가장 먼저 빠진 건 할리우드 스타였다. 영화 ‘대부’ ‘지옥의 묵시록’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Coppola) 감독은 작업실과 촬영장에서 줄곧 호스빗 로퍼를 신고 다녔던 인물로 유명하다. 할리우드 서부극 영화 주인공으로 유명했던 존 웨인(Wayne)도 호스빗 로퍼 마니아였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 그가 구찌 매장에서 신발을 신어보는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있을 정도다. 배우 더스틴 호프먼(Hoffman)도 1980년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 호스빗 로퍼를 신고 나왔다.
호스빗 로퍼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배우 소피아 로렌(Loren), 조디 포스터(Foster), 제인 버킨(Birkin)도 호스빗 로퍼를 즐겨 신었다. 조디 포스터의 초창기 사진 중엔 호스빗 로퍼를 신고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모습이 찍힌 것도 있다.
최근엔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맷 데이먼(Damon),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Dicaprio) 등이 호스빗 로퍼를 즐겨 신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선 배우 이정재와 조인성이 호스빗 로퍼를 자주 신는 배우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