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는 조선시대 민초(民草)들에게 반갑지 않은 존재였다. 행여 사체(死體)라도 떠내려 오면 해체와 운반의 고역(苦役)이 함께 왔기에 고래(苦來)라 빗댈 정도였으니 고래잡이에 나설 까닭이 없었다.

"여기에 20두(頭), 저기에 30두, 이쪽에 10두, 저쪽에 5두. 눈길이 미치는 사방팔방이 고래다."

1899년 고래잡이에 나선 일본인의 눈에 동해는 물 반 고래 반인 황금어장이었다. 그러나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졌던 향유(香油)고래와 긴수염(長鬚)고래는 그 바다에 없었다. 1848년 동해에 진출한 미국 포경선단의 30여년에 걸친 남획의 결과였다. 두 경족(鯨族)의 씨가 마른 1880년 이후 미국 배는 동해를 찾지 않았다. 당시 포경술로는 사체가 물에 뜨지 않아 바다에서 바로 해체할 수 없는 참고래와 귀신고래 등은 그림의 떡이었기 때문이었다. 1883년 일본에서 포경권을 담보로 차관을 얻어 나라의 부강을 도모할 종잣돈을 마련하려던 김옥균의 계획이 물거품이 된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 옛날 고래잡이 - 1974년 장생포구에서 긴수염고래(길이 23m, 무게65t)를 해체하는 모습. 장생포 고래박물관 소장.

맞는 순간 화약이 터지면서 작살이 우산살처럼 박혀 가라앉는 고래도 뭍으로 끌어올 수 있게 해준 폭렬(爆裂)작살이 등장한 1890년 이후 동해는 러시아와 일본 포경선단의 각축장이 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패망할 때까지 무차별 포획으로 서해의 고래까지 씨를 말렸다. 그러나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처럼 광복 후 우리 포경업도 외세가 범한 어리석음을 넘어서지 못했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국제포경위원회(IWC)의 결정에 따라 고래잡이가 전면 중지되기 두 해 전인 1984년에 나온 '고래사냥'의 노랫말이 잘 말해주듯, 당시 동해에서 고래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동해가 집채만 한 고래 무리의 유영(游泳)을 눈으로 보고 분수처럼 뿜어대는 날숨을 몸으로 느끼는 '관경(觀鯨)'의 바다로 바뀐 오늘, 잡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도 황금알을 낳는 귀물(貴物)이 된 고래의 귀환(歸還)은 환경의 소중함은 물론 망국의 아픈 역사를 일깨우는 거울로 다가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