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이나 찰지 모르겠네요." 15일 오전 일본 도쿄 신주쿠의 소극장 '타이니 앨리스(Tiny Alice)'에서 만난 정대경 충무씨어터컴퍼니(구 중구구립극단) 예술감독은 걱정이 좀 있어 보였다. 이 극장이 주최하는 소극장 한·일 연극 축제 '앨리스 페스티벌'에 초청받은 작품 '결혼'이 오후 7시 공연에 들어가는 날. "요즘 같은 정치 분위기에 객석이 절반만 차도 감사한 상황입니다."
정 감독의 예상은 기분 좋게 빗나갔다. 오후 6시가 넘어서자 이동식 좌식 의자 100개가 들어가는 극장에 손님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뒤늦게 온 사람들은 작은 쿠션 하나를 보조석으로 삼아 좁은 통로에 끼어 앉았다.
120명 몸이 붙기라도 할 듯이 꽉 찬 극장. 배우와 관객의 거리는 다섯 걸음. 전면에 걸린 커다란 마르크 샤갈의 그림과 소파, 붉은 카펫이 무대 장치의 전부인 '결혼'이 시작됐다.
'결혼'은 극작가 이강백씨의 단막 희곡으로, 교과서에도 등장한 작품이다. 정대경 감독이 각색하고 노래를 붙여 재창작했다. 결혼을 하고 싶은 빈털터리 남자가 집부터 옷까지 모든 것을 빌려서 꾸며놓고 결혼정보회사의 알선으로 찾아온 여성에게 청혼한다는 줄거리다. 여자는 결국 속은 걸 알게 되지만, 남자가 빌리지 않았던 유일한 한 가지, 진심의 힘에 끌려 청혼을 받아들인다.
관객에게 넥타이와 옷을 빌리는 설정이므로, 조용하기로 유명한 일본인의 호응을 끌어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한국말로 청하는 배우의 눈빛을 알아챈 관객은 옷을 벗어주고, 넥타이도 풀어줬다. 물론 일본 관객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서울여대에서 일본어를 강의한 인연으로 한국에 관심이 많다는 가토 아쓰코(加藤敦子) 일본 쓰루문과대 교수는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이 들어 있어서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도쿄 도심에서 대형 한류 뮤지컬이 회당 수천 명의 관객을 끌어모으는 이 여름, 알고 가지 않으면 찾기조차 어려운 지하 소극장에서 열리는 '앨리스 페스티벌'은 올해로 30년을 맞은 '작지만 강한' 축제다. 30년간 크고 작은 정치·사회적 '외풍'에도 흔들림 없이 한국 연극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오태석, 이윤택, 박근형 등 굵직한 연출가의 작품이 이곳을 통해 일본에 처음 소개됐다. 사카테 요지 등 일본 연극계 중진도 '앨리스'가 발굴했다.
지난달 시작해 내년 3월까지 15편이 이어지는 올해 페스티벌 개막작은 극단 청우의 연극 '그게 아닌데'(작 이미경·연출 김광보)였다. 지난해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과 연출상을 받은 '그게 아닌데'는 대사의 비중과 극적 밀도가 높아 언어의 장벽이 우려됐다. 그러나 사흘 공연은 역시나 만석(滿席)이었다. 연출가 김광보씨는 18일 "그 작은 극장 안으로 관객이 마구 밀려오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니시무라 히로코(西村博子) '앨리스' 극장장의 뚝심이 오늘을 만들었다. 와세다대에서 연극 이론을 전공하다 한국 연극을 알게 됐다는 그는 "돈이야 당연히 안 되지만, 배우고 느낄 게 많은 한국 작품을 쉬지 않고 소개해 온 데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결혼'은 18일까지 예정된 나흘 공연이 매진됐다. 정대경 감독은 "조용하지만 강하게 이어지는 소극장 교류가 더 큰 문화 교류로 이어질 수 있는 다리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