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이 웃는 얼굴로 어린이를 공중으로 던진 뒤 날카로운 총검의 끝으로 받아내고는 그것을 스포츠라고 부르는 모습을 봤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이런 일은 처음이다."
중국 작가 린위탕(林語堂)은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南京)대학살의 참상을 이렇게 고발했다. 14일 중국 장쑤(江蘇)성 난징시의 낮 기온은 38도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시내에 있는 난징대학살 추모관은 방문객들로 북적거렸다. 부모 손을 잡고 온 어린이부터 학생 단체 관람객, 노(老)부부까지 뙤약볕 아래 줄지어 추모관을 찾았다. 추모관 관계자는 "전국에서 온 방문객이 오늘 하루에만 수만명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간 일본군이 난징에서 30만명의 중국인을 학살한 만행을 기록한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다.
난징대학살 추모관에 들어서면 마치 무덤처럼 지하로 들어간다. 추모관은 1000구가 넘는 학살 피해자 유골이 발굴된 '만인갱(萬人坑)' 자리에 세워졌다. 중국은 1982년 일본이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중국 침략'이란 문구를 '진출'로 바꾸자 격분했다. 당시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일본) 침략의 비석을 세우라"고 지시했고, 1985년 추모관이 완공됐다. 추모관의 원래 명칭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난징 동포 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이다. 덩샤오핑이 직접 비석 글씨를 썼다.
면적 7만4000㎡(약 2만2000평)의 추모관에 있는 사진 3500여점과 전시물 3300여점은 일본군의 잔혹한 '인간 사냥'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목이 잘린 남자의 머리에 담배를 꽂아놓는가 하면 '중국인 100명 목 베기 시합 중인 두 병사'라는 일본 신문 기사에는 칼을 뽑아든 군인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리저리 절단된 유골이 진흙에 파묻힌 '만인갱'도 추모관 안에 보존돼 있다. 중국인 시신 더미 옆에서 웃고 있는 일본군 사진도 보였다.
난징에서 일본군이 중국 여성에게 저지른 만행은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려울 정도다. 성폭행한 뒤 학살한 사진만으로 벽면이 가득 찼다. 추모관 입구의 여성 조각상에는 '살해된 아기도, 생매장된 남편도 돌아오지 못하네', '달아나자, 악마가 온다' 등의 글귀가 적혀 있다. 추모관을 둘러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착잡했고 정적이 흘렀다. 어린이가 "무섭다"며 엄마 품을 파고들기도 했다.
추모관에는 12초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공간이 있다. 한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당시 12초마다 중국인이 죽어나갔다는 의미"라고 알려줬다. 당시 희생된 시신은 기차 2500량을 채우고, 시신을 포개면 빌딩 74층 높이에 달할 정도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는 일본의 만행에 대해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라"고 중국 국민에게 말했다. 추모관에서 만난 시민 자오자싱(趙家興)씨는 "(일본이) 반성을 해야 용서도 하는 것 아닌가"라며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의 태도는 판이하다. (일본을)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60대 노인 예(葉)모씨도 "일본에는 난징대학살에 대해 '중국이 조작한 것'이라고 말하는 정치인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郞) 일본유신회 공동대표 등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을 지적한 것이다.
1985년 완공 이후 지금까지 추모관을 찾은 방문객은 총 4000만명이 넘는다. 지난해 추모관 방문객은 660여만명(74개국)으로, 개관 이후 처음으로 연 600만명을 넘겼다. 그중 일본인도 4만9400여명으로 집계됐다.
추모관 직원은 "조용히 추모관을 찾아 헌화(獻花)하고 가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만인갱에는 '일본 오이타현(大分縣) 교원 일동' 명의로 된 종이학 다발 등이 놓여 있었다.
☞난징 대학살(南京 大虐殺)
1937년 12월~1938년 1월 중국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에서 일본군이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등 30여만명을 총살·생매장하거나 불태우는 등 잔학한 방법으로 학살한 사건. 당시 일본군 책임자들은 2차대전이 끝난 뒤 전쟁 범죄자로서 사형에 처해졌다. 일본 극우 인사들은 “난징 대학살은 중국이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