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선임기자

청와대가 김기춘 비서실장의 임명 배경을 발표했을 때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다.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3선 국회의원, 국회 법사위원장, 공익재단 이사장, KBO 총재를 역임하면서 입법·사법·행정에 걸쳐 탁월한 경륜과 역량을 갖췄다."

이날 그는 젊은 출입기자들에게 "여러분의 지도편달을 부탁드린다"고 인사했다. '지도편달(鞭撻·회초리)', 이런 어휘 선택은 74세인 그의 입에 붙은 것이었다. "나이 먹은 사람 살살 다뤄주세요"라고 했으면 훨씬 알아듣기 쉬웠겠지만.

그는 업무 첫날에는 "윗분(박근혜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서 비서실장이 발표드리겠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0년대부터 공직에 몸담았던 그에게 '윗분의 뜻'은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그가 누군인지를 드러낸다.

그의 경력과 연륜 앞에서는 비서실은 물론이고 총리·장관도 감히 맞서기 어려울 것이다. '윗분'을 받드는 위계질서가 잘 세워질 게 틀림없다. 국무회의 석상에서는 그의 존재만으로 재킷을 벗을까 말까를 놓고 눈치 보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경륜을 다 발휘해도 시대 흐름에 맞지 않다는 것은 이겨낼 수 없다. 지금은 그에게 익숙했던 '각하(閣下)의 시대'가 아니다. 새로운 세상을 주도하는 것은 그가 감당해낼 몫이 아니다. 사람의 수명이 아무리 늘어났다고 해도, 그 나이에 맞는 역할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어떤 사안을 판단하고 수행할 때 생물학적 나이의 한계란 늘 존재하는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는 있다. 하지만 그보다 한참 '젊은(?)' 나는 복잡한 세상 흐름을 따라가고 판단하는 데 허덕거린다. 아집(我執)이 생기고, 유연하지 못하고, 듣는 쪽보다는 자기 말이 많아지고, 체력적으로도 부친다. 국정을 주관하게 되면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원로(元老)를 대접하고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들을 시대의 주역으로 자꾸 내세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무대 중앙으로 올릴 때는 그 얼굴이 갖는 '상징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현 정권을 쳐다보고 또 묻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후진하고 있는가.

최근 두 달 사이에 있었던 다른 상징적인 인사에서도 '70대 노인'들을 전면에 세웠다.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장은 만 71세, 문화융성위원장은 76세, 지역발전위원장은 71세, 국무총리 소속 새만금위원장은 77세였다. 이들은 장·차관이나 국회의원에서 물러난 뒤로도 여기저기서 '장(長)' 자리를 맡아온 경륜의 인물임은 틀림없다. 해본 솜씨가 있으니 이들에게 맡기면 안심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임명을 통해 어떤 변화와 활력, 역동성을 느끼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분이 과연 들었을까. 세대교체의 측면에서도 이들을 무대 위에 계속 올리면, 후배 세대는 언제 어디서 그런 경륜을 쌓을 수 있겠는가. 온통 늙음이 사회를 지배해 전진하는 젊음에 길을 열어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비친다.

시대마다 시대적 과제가 있고 중심 세대가 있는 법이다. 노인들 자리는 '앞'이 아니라 '옆'에 있다. 사려 깊은 '원로'는 자문에 응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들은 설령 제안을 받더라도 '74세 비서실장'은 맡지 않을 것이다.

요즘 군과 행정부, 법조계에서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물러난 지 오래된 '올드보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복귀하는 세상이 됐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현직에 대한 퇴직 관료들의 관여와 위세가 더 심해지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가뜩이나 아버지의 유산(遺産)으로 '과거 이미지'가 강한 박 대통령이 왜 이런 인사 결정을 거듭하고 있는 걸까. 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석에서는 "이분은 일찍이 '퍼스트레이디'를 하면서 자신의 나이를 실제보다 열 살 이상으로 생각했다. 지금의 노인들은 당시 30대 중반의 관료였다. 이들에게서 여전히 그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농담도 나온다. 그러니 60대만 돼도 대통령의 눈에는 아직 젊은 축에 속한다.

현 정권은 과거 노무현·이명박 정권의 청와대와 내각 담당자들과 비교하면 평균 10년은 더 늙어 보인다. 정권의 키워드 중 하나로 '미래 창조'를 내세웠지만, 인사 때마다 '과거'와 '관치(官治)'로 더 깊숙이 돌아가는 것만 보일 뿐이다.

청와대 참모진 교체 다음 날,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새로운 변화와 도전'을 11차례나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수첩에 '변화' '도전'을 받아 적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어떻게 받아들였겠는가.

[[토론] 김기춘 비서실장 임명 논란, '과거회귀' vs. '친정체제 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