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출연 가수 나이를 전부 합치니 876세, 평균 58.4세였다. 인생 희로애락을 대부분 겪었을 그들이 갱도(坑道)와 병상(病床)에서 청춘을 바친 독일 교포들과 어우러져 빚어낸 무대의 에너지는 아이돌 공연이나 록 페스티벌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난 3일(현지 시각) 독일 보훔 루르 콩그레스홀에서 열린 한·독 수교 130주년, 근로자 파독 50주년 특집 KBS '가요무대'의 네 시간 공연은 2000여 청중을 울리고 웃기면서 40~50년 전으로 데려간 타임머신이었다.
오후 4시 파독 간호사 합창단의 독일 민요 '들장미'로 시작한 공연은 추억의 선율들이 흘러나오며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조금씩 무너졌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김연자) '갈대의 순정'(송대관) '대머리 총각'(김상희) '이별'(권성희) '빨간 구두 아가씨'(설운도) 등 독일행 비행기에 처음 몸을 실을 무렵 즐겨 듣던 가요에 청중은 손뼉 치고 껑충껑충 뛰기도 했다.
국악인 김영임과 소리꾼 장사익이 선사하는 '타향살이' '꽃구경' 등 우리 가락, '꿈에 본 내 고향'(김국환) '고향무정'(이자연) '머나먼 고향'(현철) '고향초'(주현미) 등 고향 노래와 '비 내리는 고모령'(김용임)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현숙) '부모'(진미령) '사모곡'(태진아) 등 혈육의 정을 다룬 노래가 이어지자 청중의 눈망울엔 이슬이 그렁그렁 맺혔다. 또 1977년 광부 생활 다섯 달 만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故) 김중원씨가 고국의 아내와 노모, 어린 두 딸에게 보냈던 애틋한 편지 내용이 소개되자 객석은 숙연해졌다. 1963~1982년 김씨처럼 이역만리 광산 갱도에서 스러져간 한국인은 모두 78명(파독광부백서)이었다.
항상 '멀리 해외에서 이 방송을 지켜보는 해외동포·근로자 여러분'이라는 인사말로 '가요무대'를 열어온 MC 김동건의 목소리도 이날은 유독 떨렸다. "제가 1963년 3월에 아나운서가 됐고, 그해 12월 파독 광부 1진의 출국 소식을 뉴스로 전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이제 여든을 향해 달려가고 있네요. 제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독일어입니다. 이히 리베 디히(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번 공연은 파독 산업전사 세계총연합회 고창원 회장이 '3만5000여 동포가 가요무대의 독일 공연을 꼭 보고 싶어 한다'는 긴 편지를 올해 초 KBS에 보낸 것을 계기로 추진됐고, 한독간호협회 등 동포 단체들도 힘을 보탰다.
청중은 독일 전역에서 버스와 승용차로 공연 시작 4~5시간 전부터 몰려들었고, 광부·간호사와 결혼한 푸른 눈의 반려자들과 자녀들도 객석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1973년에 간호사로 독일에 온 설경자(60)씨는 "독일 남편과 결혼해 애들 키우고,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고, 아이들이 벌써 예전의 내 나이가 됐죠. 고등학교 때 시민회관에서 20대 김상희씨가 판탈롱을 입고 껑충껑충 뛰며 노래하는 걸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이라고 했다. 1970년대 광부로 독일에 와 호스피스 간호사로 전직(轉職)한 이광일(63)씨는 "다음번엔 2세, 3세도 함께할 수 있도록 젊은 가수들도 함께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요무대 독일 공연은 오는 12일과 19일 밤 10시부터 KBS 1TV에서 방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