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서 다 반대했는데 제가 한다고 했어요. 저,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3월 취임 당시 '국민검사청구제도' 도입을 선언하면서 한 말이다. 금융회사의 부당 행위 때문에 피해를 본 소비자가 금감원에 검사를 청구하면, 그 청구가 타당한지 판단한 후 조사해서 소비자를 돕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감원 내부에선 반대가 들끓었다. 수백 건이 물밀듯 들어올 수 있는데 어떤 걸 받아들이느냐를 두고 잣대 논란이 생길 수 있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금감원이 정치적 논란의 한복판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 원장은 단호했고, 금감원은 실무 준비를 마친 뒤 지난 5월 국민검사청구제를 시행했다.
26일 최 원장의 야심작은 냉정한 현실에 부딪혔다. 금감원은 이날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 의혹을 조사해 달라는 국민검사청구를 기각(棄却)하고 말았다. 한 소비자단체가 소비자들을 모아 이달 초 제출한 것으로, 제도 도입 후 첫 청구였다. CD 금리 담합 의혹은 은행들이 짜고 대출 금리 산정 기준이 되는 CD 금리를 조작하는 바람에 대출자들이 부당하게 수천억원의 이자를 더 냈다는 게 골자다.
금감원이 밝힌 기각 사유는 두 가지다. 금융 회사의 부당한 업무 처리로 인해 소비자가 피해를 봤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나와 있지 않고, 이미 이 사안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를 진행하고 있어 공정위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CD 금리 담합 의혹이 청구됐을 때부터 금감원이 기각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지난해 이 문제가 불거졌을 당시 금융 당국 스스로가 "CD 금리 담합은 없다"고 항변하면서 담합 의혹을 제기한 공정위에 맞섰던 사안이기 때문이다. 최 원장은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며 원론적 발언을 고수했지만, 꽤나 속앓이를 했을 것이다. 금융권 일각에선 "평소 같으면 금감원이 조사가 계획된 사안을 소비자단체에 역으로 흘려 생색을 냈을 텐데, 일이 꼬였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이번 사례는 정밀한 정책적 고려 없이 포퓰리즘(populism·인기영합주의)적으로 추진한 졸속 제도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금감원은 앞으로 들어오게 될 2호, 3호 국민검사청구를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금융감독 수장은 인기를 좇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인기 없는 정책이라도 필요하다면 밀고 가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을 최수현 원장이 되새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