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도쿄에서 첫 한·일 바둑교류전이 열렸다. 한국은 정창현을 비롯한 세 기사가 공식전 세 판, 친선대국 여섯 판을 둬 2승에 그쳤다. 그나마 공식전은 일본이 한국 체면을 봐줘 덤 네 집 반의 호선(互先)으로 치렀지만 친선대국은 치수(置數)를 접어줬다. 한국이 흑을 잡는 정선(定先)이거나 덤을 두 집 반으로 줄였다. 3년 동안 한국이 4승 23패로 힘을 못 쓰자 일본은 '얻을 게 없다'며 교류전을 끝냈다.
▶일본 바둑은 16~17세기 혼인보(本因坊)를 비롯한 4대 바둑 가문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함께 컸다. 기보(棋譜)를 남겨 대를 이어 연구하고 무신정권 막부(幕府)도 기사들을 지원했다. 일본은 20세기 들어 1990년대 초까지 세계 바둑계를 휩쓸었다. 88년 대만 재벌 잉창치(應昌期)가 첫 국제대회를 만들려 하자 일본은 서둘러 후지쓰(富士通)배를 창설해 선수를 쳤다. 일본은 후지쓰배 초기 다섯 대회를 우승했다.
▶2011년 한국기원에 전문 한 통이 날아들었다. 오타케(大竹) 일본기원 이사장이 후지쓰배 중단을 알리는 '부고장'이었다. 일본은 한국이 후지쓰배 6회부터 24회까지 19차례 중 15차례를 우승하자 더 견디지 못했다. 2005년 한·중·일이 겨루는 농심배에서 한국 마지막 주자 이창호가 중국 3명, 일본 2명을 내리 불계로 누르고 우승했다. 중국 언론은 이백(李白) '촉도난(蜀道難)'을 인용해 찬탄했다. '한 사내 관문 지키니 만 사내 뚫지 못하네(一夫當關 萬夫莫開).'
▶20년 가까이 전성기를 누려 온 한국 바둑에 지난달 참사가 닥쳤다.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1·2회전에서 한국 기사 14명이 모두 탈락하고 8강에 중국 6명, 일본 2명이 올랐다. 지난주 베이징에서 가린 제1회 몽백합(夢百合)배 16강도 중국 13명, 한국 2명, 일본 한 명이었다. 중국은 20년 전 '한국 추월'을 내걸고 바둑 영재를 체계적으로 키웠다. 90년대 이후 태어난 '90후(後)' 신세대 인재를 바둑계로 끌어들였다.
▶한국 바둑의 몰락은 일본을 빼닮았다. 90년대 전자게임이 일본 청소년을 바둑판에서 떼어놓았듯 한국 청소년은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즉흥적·자극적 감성에 젖은 젊은이들이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봐야 하는 바둑을 반길 리 없다. 달이 차면 기울듯 어떤 분야 경쟁력이 절정에 오르면 다른 기업이나 나라로 주도권이 넘어가게 마련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바둑 패권 변천사(史)는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인간사 이치를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