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년(순조 22년) 4월 22일, 관서 지방을 비밀리에 순찰하던 암행어사 박래겸(朴來謙·1780~1842)이 말과 시종을 먼저 보낸 뒤 고개 위 나무 밑에서 혼자 쉬고 있었다. 마을 군관들이 갑자기 앞에 나타났다. "요즘 암행어사를 사칭해서 돈을 뜯어내는 자들이 있다는데…." "당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보니 수상한데 가짜 어사 아냐?" 허리춤에서 쇠사슬을 들춰내 체포할 기세였다.

다급해진 박래겸은 품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너희들 혹시 이런 거 본 적 있느냐?" 마패였다. 군관들은 혼비백산하다가 자빠져 고개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당시 가짜 어사가 얼마나 활개를 쳤는지, 진짜 어사의 신분 위장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조선 후기의 암행어사 활동 일지인 박래겸의 '서수일기'(西繡日記·푸른역사 刊)가 처음으로 번역돼 나왔다. 조남권 전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장과 박동욱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교수가 번역한 이 책은 1822년 3월 16일부터 7월 28일까지 126일 동안의 평안도 암행어사 기록이다.

암행어사 박래겸은 126일 동안 모두 4915리(里)를 이동했다. 1리를 400m로 계산하면 약 2000㎞를 이동한 셈으로, 경부고속도로(416㎞)의 5배에 가까운 거리다. 말을 타거나 걸어서 하루 평균 약 40리(16㎞), 많게는 120리(48㎞)를 가야 했다. 강행군을 하다 순직한 어사도 있었다.

'암행어사 출두'는 126일 동안 모두 8회, 보름에 한 번꼴로 실행됐다. 보안상의 이유인 듯 지리적으로 가까운 인접 고을부터가 아니라 불규칙한 순서로 진행됐다. 주로 저물녘에 높은 문이나 관아의 문 앞에서 '출두야―!'를 외쳤고, 고을 수령의 부재 여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암행어사의 주요 권한인 '봉고파직' 중에서 관가의 창고를 잠가 버리는 봉고(封庫)만 두 차례 이뤄졌다.

'보안 문제'는 암행어사 업무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고을 수령이 옛 친구인 경우엔 신분 노출이 두려워 만나지 못했고, 의심 많은 뱃사공이 자꾸만 캐물어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기생들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한 퇴기가 그를 보고 "떨어진 도포에 찢어진 신발 차림이지만… 버젓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걸 보니 예사 분 같지 않소이다"라고 하자, 들통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줄행랑을 놓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암행어사의 조사 방식에 이르러선,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그다지 엄정하지 않아 보이는 점도 드러난다. 피감 기관장인 고을 수령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유람선을 타고 시(詩)를 읊은 일, 그가 소개한 기생과 동침한 일까지도 빠짐없이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암행어사의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박래겸이 민가를 지나던 중 한 할머니가 우는 아이를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암행어사 온다, 뚝!" 그가 이유를 묻자 노파는 "어사가 암행한다는 말을 듣고 마을 관리들이 모두 덜덜 떨기 때문"이라며 "살기가 편해졌으니 자주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죄를 다스리는 일에 앞서 죄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암행어사의 순기능이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