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놓은 밤톨처럼 생긴 김수현(25)의 입에선 깍뚝 썬 무 같은 대답들이 툭툭 나왔다. 예를 들어, "당신만큼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또래 배우도 있을 텐데 왜 대중들은 유독 당신에게 열광하느냐"고 물어보면 "다 작품과 동료 배우들 덕분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모든 대답은 "~ㅂ니다"로 끝났고, 행여 말이 잘못 나오면 "죄송합니다"라고 한 뒤 다시 고친 대답을 이어갔다. 말을 끝낸 뒤 나오는 '허허허' 하는 웃음마저도 그의 성대에서 뭉툭하게 썰려서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와 기자 사이에는 소속사의 '실장님'이 앉아 있었다.

3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수현은“학창 시절 사람들과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내성적이어서 연기를 시작했다. 지금도 대본 보면서 발표할 때 글자가 안 보인다. 대본이 흔들려서”라고 하면서 손을 심하게 떨어 보였다.

장철수 감독의 '은밀하게 위대하게'(5일 개봉)에서 주연을 맡은 김수현은 영화 안에서 네모반듯하게 잘린 채소가 아니라 이 그릇 저 그릇을 옮겨다니며 찰랑거리는 물에 더 가깝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웹툰 작가 훈(최정훈)의 동명 인기 웹툰을 갖고 만든 영화로 북한에 버림을 받은 남파특수공작부대의 엘리트 요원들을 그렸다. 김수현은 산동네의 허름한 수퍼마켓에서 일하며 '동네 바보'로 위장한 북한 최고의 엘리트 요원. 비 오는 날 동네 사람들 앞에서 변을 보다 그 위에 미끄러지거나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굴러 떨어지는 '슬랩스틱' 개그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는 바보와 엘리트를 오가며 여유롭게 관객들을 풀었다 조여주는 호연(好演)을 한다. 그가 바보 연기를 주로 선보이는 전반은 캐릭터의 힘으로 버티지만 신파와 액션이 난삽하게 뒤엉킨 후반에선 영화가 덜컹거리며 흔들린다.

―드라마 '해품달'(해를 품은 달) 이후 여러 배역 제의가 많이 들어왔죠? 왜 하필이면 이 작품인가요?

"그전의 10배쯤? 한 50권 정도 시나리오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멜로나 로맨틱코미디도 있었고, 간첩이 주인공인 다른 작품도 있었습니다. 웹툰이 인기가 많다고 해서 호기심에 읽어보다가 결국 울었습니다. 바보와 엘리트의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연기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고, 인기 웹툰의 사랑받는 캐릭터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바보와 엘리트, 둘 중 무엇이 더 힘들던가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둘 다 그다지 힘들진 않았습니다. 물론 겨울에 촬영을 하니까 춥고, 맞은 데는 아프고, 그래서 신체적인 고통은 좀 있었지만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왕('해품달')과 바보를 다 해봤으니, 앞으론 뭘 하고 싶나요.

"최민식, 한석규, 하정우, 황정민 선배님…. 어떤 분은 눈빛으로 관객을 당기고 어떤 분은 밀고, 또 어떤 분은 품기도 하죠. 제가 하고 싶은 것도 눈빛으로 관객들을 튕겼다 끌어당기는 연기입니다."

영화‘은밀하게 위대하게’의 한 장면.

지난달 31일 서울 경희대에서 열린 이 영화의 특별시사회는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를 연상케 했다. 영화 상영 중 김수현이 맨살을 드러내거나 김수현과 이현우가 서로를 애틋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나오면 여성 관객들은 소리를 지르고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영화가 재밌거나 말거나, 김수현이 나온다는 게 이들에겐 중요한 것 같았다.

―인기가 많아지니 변했다는 얘기도 듣죠?

"네, 저는 변했습니다, 많이. 겁이 많아졌고 작아졌습니다. 어딜 가도 비밀이 많아지고 아껴야 하다 보니 작아졌습니다. '해품달' 이후엔 집에서 잘 안 나기도 했는데 그렇게만 있다 보니 더 작아졌단 기분이 듭니다. 그런 것들에 적응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많이 힘들 것 같은데요.

"요즘엔 학교(중앙대)도 가고 친구들과 밥 먹고, 볼링 한 게임 치는 게 낙이에요. 그런데 예를 들자면 볼링장에서 스트라이크를 쳐도 좋다고 막 까불지도 못하죠. 공이 도랑에 빠질 땐 욕도 한번 해줘야 하는데 그것도 못 합니다. 저도 그런 책임감 없이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건 제 선택이고, 거기서 오는 긴장감이 싫지만은 않습니다. 이렇게 해야 필요한 사람을 얻을 수 있고, 일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요."

―애늙은이가 다 됐겠네요.

"네, 조금 그렇게 됐습니다. 원래의 캐릭터는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술을 마시면 그게 나올까 해서 마셔봤는데 그렇지도 않던데요."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어요?

"네버(Never). 그랬다간 제가 잘못될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이게 필요하니까 괜찮습니다. 눌러놓을 수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된다면 안 누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