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이언 모리스 지음|최파일 옮김|글항아리
1008쪽|4만2000원
이 책의 번역된 제목엔 원제에서 빠진 표현이 있다. 원제는 '왜 지금 서양이 지배하는가(Why The West Rules For Now)?'이다. 서양의 지배는 '지금(for now)'에 국한된 한시적 현상이란 뉘앙스다. 미국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인류가 지구 상에 출현한 이후 동양과 서양의 거주자들이 지구의 주인 자리를 놓고 끝없이 엎치락뒤치락했으며, 서양이 지금 누리는 패권은 향후 100년 안에 끝난다고 예언한다. 저자는 그간의 주도권 싸움에서 승패를 결정한 요소를 찾기 위해 역사시대는 물론, 선사시대의 동서양에 대한 고고학 지식을 통합하고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까지 파고드는 방대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처음부터 서양이 앞섰다?
동양과 서양은 150만년 전 원시인류가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유럽과 아시아로 퍼질 때부터 경쟁을 시작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인류 태동기부터 고착된 결정적 차이가 동양과 서양 사이에 존재하며, 서양이 늘 앞서왔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장기고착 이론'이다. 산업혁명 때문에 서양이 동양보다 앞서게 된 것이 아니라 서양이 늘 앞서왔기에 산업혁명은 서양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저자는 이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생물학과 고고학 지식을 동원한다. 150만년 전 유럽에는 우수한 네안데르탈인이 정착했고 아시아에는 그보다 처지는 호모 에렉투스가 나타났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의 우위는 6만년 전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떠나면서 끝났다.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을 몰아내고 동양에서 호모 에렉투스를 대체한 현생인류 사이에는 사는 지역과 관계없이 유전적 우열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이전에 축적된 동서양의 발전 차이를 지웠다. 호모 사피엔스는 동양과 서양에서 개를 키웠고, 농경을 시작했으며, 종자를 개량했다. 사자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부장품도 묻었다.
◇지리가 우열을 가른다
수나라가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끝낸 서기 6세기, 동양이 서양에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이 변화를 초래한 가장 중요한 변수로 저자는 지리적 조건을 꼽는다. 강남의 너른 평야에서 생산된 곡물을 북쪽 도시들로 실어나르기 위해 수나라가 판 대운하는 중국의 지리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꿔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반면 동로마제국이 지배하는 서양에는 중국 강남 같은 토지가 없었다.
이후 1000년간 지속된 동양의 우위를 끝내고 서양의 시대를 연 것도 '지리'다. 서양 우위의 시대는 아메리카대륙의 발견과 함께 시작된다. 당시 중국 명나라는 포르투갈보다 더 크고 기술적으로 앞선 배를 만들었지만, 환관 정화가 이끄는 명의 함대는 태평양 동쪽이 아닌 서쪽의 인도와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반면 유럽의 국왕들은 태평양보다 훨씬 작은 바다인 대서양을 손쉽게 건너 아메리카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자원을 약탈해 부를 축적했다. 지리적 조건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2000년 전에는 탄광 근처에 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한 18세기엔 영국의 탄광지대가 국가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지리적 조건으로 부상했다.
◇2103년, 서양의 패권은 끝난다
저자는 동서양 문명의 발전을 계량화하기 위해 '사회발전 지수'라는 분석틀을 사용한다. 서기 2000년의 사회발전 지수를 1000점이라 가정하고, '에너지 획득' '도시화' '전쟁 수행 능력' '정보기술'에 각각 250점씩 배분했다. 저자는 지난 150만년 동안 1000점을 차곡차곡 쌓은 인류가 향후 단 100년 만에 5000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또한 중국·일본·한국에서 지금과 같은 속도로 도시화가 진행되고 무기 생산과 에너지 사용을 늘린다고 가정할 때, 2103년에는 동양이 서양을 추월한다고 전망한다. 그러나 이는 수치상의 미래일 뿐이다. 지구는 사회발전 지수 5000점짜리 문명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이 점수에 도달하려면 도쿄 인구가 1억4000만명이 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먹고 씻고 차를 타면서 1인당 130만킬로칼로리를 매일 쓰게 되는데, 지구의 자원과 환경이 이런 소비를 감당하지 못한다. 게다가 지금까지 문명의 우열을 결정했던 지리는 향후 100년간 전개될 기술 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변수가 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22세기는 동양과 서양, 어느 한쪽이 패권을 쥐기보다는 양쪽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동안 경쟁해 온 두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