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민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는 소위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정책)는 일본 중앙은행의 화끈한 공조 없이는 불가능한 정책이다. 실제로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중앙은행 총재는 지난달 4일 아베 총리의 취임 100일에 맞춰 향후 2년간 시중 통화량을 2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물가 안정을 최고의 기치로 삼아야 할 중앙은행 총재가 정부 정책에 발맞추기 위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위험을 무릅쓰고 시중에 막대한 자금을 풀기로 한 것이다.
경쟁국 일본의 이 같은 비정상적인 조치와 악화되는 국내외 경제 상황 등을 감안할 때 지난 9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의 기준금리 인하 조치는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금리 인하에 이르는 과정엔 아쉬움이 남는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이번 금통위가 열리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금리 동결을 시사했다. 하지만 금통위가 끝난 뒤 "제가 혼자서 소수 의견을 내거나 하지는 않는다"며 은근슬쩍 금리 인하 쪽으로 돌아섰다. 총재의 갑작스러운 말 바꾸기 때문에 독립성이 생명인 중앙은행의 신뢰가 무너졌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김 총재는 주요 경제 부처 수장 가운데 유일하게 전(前) 정부에서 임명됐다. "새 정부가 경제를 살려보겠다는데 훼방을 놓는다"는 등의 비판 앞에서 그가 감내했을 고충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갈지자 행보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태국은 올해 연 5% 이상 고(高)성장이 예상되면서 연초부터 막대한 해외 자금이 몰려들었다. 이로 인해 달러화 대비 태국 바트화 환율은 한때 연초보다 6%나 평가절상됐다. 당장 수출 기업들이 들고 일어났다. 또 키티랏 나-라농 태국 재무장관은 지난 2월 금통위에 "금리를 인하하라"고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는가 하면, 공개 석상에서 "중앙은행 총재에 대한 해임도 생각했다"고 말하며 중앙은행을 압박했다.
이 같은 압력에도 프라산 트라이랏와라쿤 태국중앙은행 총재는 "금통위는 물가가 안정되고 경기가 과열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환율을 염두에 두고 금리를 조정할 수 있다"며 지난 6개월간 금리를 동결했다. 하버드대 경영학 박사 출신인 프라산 총재는 김 총재와 마찬가지로 전 정부에서 임명됐다.
프라산 총재는 지난 11일 처음으로 금리 인하 가능성을 언급했다. 다만 20일 발표될 1분기 경제동향 데이터를 보고 판단하겠다고 했다. 올해 들어 태국의 인플레이션율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상 금리를 내리겠다는 제스처로 해석된다. 시장의 요구에 따라 금리를 내리면서도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유지할 명분을 확보한 셈이다.
일본중앙은행은 자존심을 버리고 정부의 경제 살리기에 발 벗고 나섰다. 태국중앙은행은 비록 이 나라가 금융은 낙후됐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시장에 각인시켰다. 게도 구럭도 다 잃는 한국은행의 이번 같은 금리 결정은 앞으로 더 이상 안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