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빨래를 정리해야겠다고 며칠 전부터 별렀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봄날씨 때문에 계속 미뤄진다. 그날 새벽 하늘은 고운 반달까지 더해졌다. 돌계단 끄트머리에 서서 한참 동안 바라보며 달의 주변까지 살폈다. 달무리도 없으니 당연히 맑은 날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옳거니!' 하고 세탁기를 돌렸고 내친김에 생각지도 않던 담요까지 과감하게 물에 담갔다. 하지만 해가 뜰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주위는 문자 그대로 계속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아침 안개가 낀 날은 본래 맑은 법이다. 흐릿한 주변을 보면서도 혼잣말로 "안개가 끼었겠지"라고 단언하며 세탁물을 건조대에 널었다. 하지만 그것이 안개가 아니라 비구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리 일기예보의 힘을 잠깐이라도 빌렸으면 이런 낭패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너무 자신의 눈만 믿은 것이 화근이었다. 졸지에 만난 비를 피해 부랴부랴 빨래를 좁은 내 방으로 옮겨서 널어야만 했다. 본래 인생사라는 것이 몇 시간 앞도 제대로 알 수 없는 법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빨래를 빨리 해결하고 싶다는 쓸데없는 조바심이 문제를 키운 원인이었다. 뭐든지 서두르면 실수가 뒤따르기 마련인가 보다. 이제 살아온 연륜에 걸맞게 좀 더 진중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다짐은 매번 다짐으로 끝났을 뿐이다. 지난 겨울에 저질렀던 과유불급(過猶不及)한 일까지 떠올랐다. 월동 준비를 위한 몇 가지 울력을 할 때도 관심은 벽 틈새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을 제대로 막아야겠다는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그 결과 뒷문은 물론 창문까지 단열재를 덮고서 과감하게 봉했다. 심지어 주로 출입하는 두 짝으로 된 앞문 역시 한짝에는 같은 조치를 취했다. 그 때문에 그 문마저 쪽문으로 바뀌었다. 아름다운 창살에 은은한 한지를 덧붙인 우아한 한옥의 문이 대부분 벽처럼 바뀌면서 그야말로 무문관(無門關)이 된 것이다. 그 결과는 완벽한 보온이었다. 특히 맹추위가 덮친 날에는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얼마 후 참을 수 없는 불편한 문제가 나타났다. 숨 쉬는 한옥을 포기한 대가는 참으로 가혹하다. 통풍이 전혀 되지 않는 갑갑한 실내 생활을 겨우내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참다못해 통풍을 위해 앞문을 열어도 냉기만 들어올 뿐 정작 원하는 환기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함께 도와주어야 할 뒷문이 없어진 까닭이다. 무슨 일이건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가야산은 4월에도 큰 눈이 두 번이나 내렸다. '춘래불사춘'이라 했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다. 문에 덧댄 단열재를 성급한 마음으로 걷어내면서 문틀 구석구석 쌓인 묵은 겨울 먼지까지 털어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보란 듯이 뒷문부터 활짝 열었다. 한쪽 코로 숨을 쉬다가 양쪽 코가 모두 뚫린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소박한 뒤뜰 담장 너머 먼 산에는 연둣빛 신록 세계가 경이롭게 펼쳐지고 있었다. 뒷문으로 바라보는 풍광의 여유로움은 앞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옛집은 숨겨진 뒤란의 세계가 더 아름다운 법이라는 어느 고가(古家) 예찬론자의 글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앞문은 공적으로 중요하지만, 뒷문은 사적(私的)으로 소중하다. 절집 역시 앞문을 열 때는 칼칼하고 규칙적인 걸음 소리만 들린다. 하지만 뒷문을 밀면 느긋한 슬리퍼 끄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앞문의 세계는 '교과서대로'라고 말하고 있지만 뒷문의 세상은 허물도 모른 척하고 눈감아주는 인정이 깃들어져 있다. 앞문의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지만 뒷문 세상은 그마저 잠시 잊어도 좋을 만큼 느긋한 휴식이 있다. 임제(臨濟·?~867) 선사의 "관불용침 사통거마(官不容針 私通車馬)"라는 말씀처럼 앞문은 언제나 바늘 한 개 꽂을 틈조차 없지만 뒷문은 항상 수레가 지나가도 될 만큼 여유롭기 때문이다.
또 봄비가 내린다. 같은 비인데도 빨래를 널어놓은 이후에 만났던 그 비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뒷문을 통해 듣는 빗소리는 귀에 착착 감긴다. 며칠 전 옮겨 심은 연보라빛 수국은 아직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탓에 비를 뒤집어쓴 채 무거워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그 소담스러운 꽃송이가 비스듬히 담장을 기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마저 일어난다. 담장 밖에는 우의를 온몸에 두르고 봄산을 찾는 상춘객들의 걸음걸이를 따라 절 마당에는 발자국이 꽃처럼 피어난다.
올겨울에도 대도무문(大道無門)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채 '보온이냐? 통풍이냐?' 해묵은 과제를 붙들고서 씨름해야 할 것 같다. 등산복 광고처럼 보온도 되고 통풍도 되는 '고어텍스 문'을 만난다면 이 모순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