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사는 우리와는 다르게, 서호선(74)씨는 인생 대부분을 하늘에서 보내고 있다. 그는 현역 최고령 조종사다. 비행기 조종간을 잡은 햇수가 올해로 50년이 됐다. 그는 전투기→수송기→여객기를 몰았고, 지금은 항공 촬영을 하는 회사에서 경비행기를 몰고 있다.

"사업용 항공기는 나이 제한이 없다. 매년 건강검진을 받으면 육체적 나이는 40대로 나온다."

짧게 깎은 머리와 두꺼운 목덜미가 그걸 증명했다. 김포공항 활주로 외곽에서 그의 비행기에 탑승했다.

미국에서는 출퇴근용인 9인승 세스나기(機)를 개조해 좌석 4개로 줄였고, 동체 아래엔 자동 카메라가 부착돼있다. 카메라가 30억원대로 비행기 가격과 맞먹는다. 30초당 한 장씩 자동으로 촬영된다고 했다.

비행기는 심하게 흔들렸다. 풍랑 속 배를 탄 듯 속이 메스꺼웠다. 가는 곳은 전북 익산이었다. 공단 조성을 위해 익산시청에서 발주한 것이다. 촬영 지점에 접근해서는 40여분 동안 빙빙 돌았다. 멀미의 정점은 이때였다.

그를 만난 것은 '현역 최고령 조종사' 타이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인간의 삶이 이렇게 파란만장할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남 서천군의 산골 출신인 그는 상경해 야간고에 다녔다. 조선일보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1959년 그 급사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19기)한 것이다.

생도 1학년 때인 초여름 어느 날, 수업을 받던 그는 학교 본부로 호출됐다. 생도대장(준장)이 말했다.

"한 달 전쯤 자네를 퇴교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자네의 평소 품행으로 납득이 안 가 재고를 해달라고 상신했다. 하지만 특무대(보안사)에서 '오늘 자로 퇴교 조치하고 보고하라'는 문서가 다시 내려왔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퇴교 사유는 '신원(身元) 불량'이었다. 6·25 때 누나가 '여성동맹 위원'으로 활동했고, 외삼촌은 '보도연맹'으로 처형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퇴교 조치된 그는 특무대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우리 마을에서 그때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은 누나밖에 없었다. 적(赤) 치하에서 한글을 아는 여자는 면사무소에 나오라고 해서 몇 번 나갔다고 한다. 그게 여성동맹 위원이 된 연유다. 외삼촌은 내가 너무 어려서 얼굴도 잘 몰랐다. 그분 아들인 외사촌 형은 현재 공군 현역 소령으로 근무하고 있다. 왜 나만 연좌제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가."

최보식이 만난 사람, 서호선씨

젊음의 좌절감으로 혼자 돌아온 뒤 일주일 지나서였다. 특무대에서 연락이 와서 다시 들어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자네 가족의 부역 행위는 허위가 아니나 현실을 무시해 과도하게 처리한 것 같다. 하지만 이미 퇴교 조치가 됐으니 복교는 어렵다. 만약 자네가 다시 육사에 시험을 쳐 들어가면 신원 관계는 문제 삼지 않겠다."

그가 낙향하자, 누나가 울며 불며 "네가 사관학교에 다시 안 들어가면 우리는 '부역자' 낙인이 찍힌다. 제발 다시 사관학교 시험을 쳐라"고 사정했다. 육사에 다시 들어가면 동기생은 상급생이 된다. 그런 창피를 그는 견뎌내진 못할 것 같았다. 그해 말 그는 공군사관학교에 합격했다. 그가 공사 생도가 됐다는 소식에, 영문 모르는 육사 동기생들은 "참 웃기는 놈"이라고 했다.

공군 소위로 임관한 그는 '조종사'가 됐다. 어느 날 조종 훈련 중 한 동기생의 실수로 단체 기합을 받게 됐을 때, 야구방망이에 잘못 맞아 그의 척추뼈가 어긋났다. 군병원에서는 민간인 의사를 불러와 척추 수술을 마쳤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규정상 기동(機動)이 심한 전투기를 탈 수 없었다. 그는 수송기 부대로 전출됐다. 여전히 그는 촉망받는 장교였다.

1982년 미국의 공군대학에서 석사과정 교육을 마치고 돌와온 그는 비행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6월 어느 날 새벽, 그의 부대 조종사가 특전사 훈련병들을 싣고 출발했다. 한강 미사리에서 낙하 훈련이 예정돼 있었다. 그 베테랑 조종사에게는 익숙한 항로였다. 하지만 그날 수송기는 이륙한 뒤 구름 속 청계산을 들이받았다. 조종사와 훈련병 등 53명 전원이 숨졌다(청계산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음).

군 조사 과정에서 그는 "우리 대대원이 희생됐으니 내게 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 상급자로는 전대장, 작전부장, 비행단장이 있었지만, 그가 지휘 책임을 지고 전역했다. 연좌제로 퇴교 조치당하고 다시 들어갔던 군(軍)과는 이렇게 인연이 끝났다.

"당시 상황은 최악이었다. 사고 바로 한 해 전인 1981년에도 특전사 40여명이 비행 사고로 순직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제주도 방문에 앞서 경호를 위해 내려가다가 변을 당했다. 제주도에는 항법 시설이 두 곳에 있다. 제주공항에는 이착륙을 위한 항법 시설, 한라산 정상에는 항로(航路)를 위한 항법 시설이 있다. 초짜인 조종사가 이를 모르고 악천후에 한라산 항법 시설로 접근해 사고가 난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군 사고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중령으로 전역한 뒤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1988년 아시아나항공이 설립되자, 창설 팀을 꾸리던 공사 선배의 권유로 그쪽으로 옮겼다. 그는 아시아나항공의 모델로 나오기도 했다. 조종사 최고 직급인 운항(運航) 상무까지 올라갔다. 정년 뒤에는 조종사 자격시험을 담당하는 건설교통부 심사관(촉탁직)으로 재직했다.

―차를 몰 때처럼 비행기도 초행길에는 서툰가?

"어떤 노선으로 처음 비행을 나가려면 먼저 '관숙(慣熟) 비행'을 한다. 교관급이나 이미 그 노선을 다녀본 기장과 함께 가본다. 지형지물과 기후 특성을 미리 익혀두는 것이다. 1997년 대한항공 801편 괌 사고(228명 사망)도 조종사가 이 노선에 익숙하지 못해 발생했다. 괌 공항의 항법 시설은 활주로와 다른 곳에 멀리 떨어져있다. 조종사는 항법 시설 쪽으로 따라가다가 언덕을 들이받았다."

―어떤 노선의 첫 비행은 사고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하나?

"조종사는 이륙 전 두 시간쯤 노선을 확인해야 하는 규정이 있다. 요즘에는 내비게이션이 이륙부터 착륙까지 아주 정확하게 유도해준다. 가끔은 항로를 잘 안다고 자신할 때 더 위험할 수 있다."

서호선씨는“비행기가 착륙할 때 쿵 떨어지는 게 안전하고 규정에도 맞는다”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무슨 뜻인가?

"1978년 무르만스크에서 대한항공 902편이 소련 전투기에 의해 강제 착륙당한 사건(2명 사망)이 있었다. 당시 파리에서 출발한 여객기는 북극 항로로 들어섰다. GPS는 없던 시절이었다. 조종사는 이륙할 때 좌표를 찍는 것을 깜박했다. 늘 다니던 길이고, 별을 보고 항법사도 있으니 자신이 있었다. 이 노선에서는 소련 영공에 가까이 붙어오면 최단 거리다. 그러다가 소련 영공에 잘못 들어갔던 것이다."

―창공(蒼空)은 비어있고 지상에서처럼 도로를 닦아놓은 것도 아닌데, 하늘의 길이 있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여객기는 아무 데로 못 간다. 항로가 딱 정해져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비행기의 컴퓨터 화면으로는 보인다."

―한 공항에서 다른 공항으로 가는 항로는 딱 하나뿐인가?

"두 비행기가 나란히 날 수는 없다. 다만 위아래로 날 수는 있다. 보잉 점보가 위에서 날고, 그 아래로 보잉 757기(機)가 동시에 나는 경우가 있다. 비행기 간에는 고도(高度) 간격이 있다. 그전에는 2000피트(600m) 간격이었는데, 지금은 1000피트 간격으로 바뀌었다. 비행기 운항 대수가 많아져서 자꾸 연착이 되니까 고도 간격을 줄이게 됐다."

―어떻든 날아가면 되는데 너무 높이 올라서 날아갈 이유가 있나?

"높게 올라갈수록 연료 소모량이 적다. 공기 흐름이 없고 중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비행기 성능상 최고 고도와 최저 고도가 있다. 가능한 한 최고 고도로 가려고 한다. 비행을 할수록 연료가 소모돼 가벼워진다. 그러면 관제탑에 '고도를 더 높이는 걸 허용해달라'고 요청한다."

―비행 중 조종사들은 어떤 일을 하나?

"요즘에는 버튼만 누를 뿐이지 수동으로 조종간을 잡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도를 더 높여라' '앞 비행기와 얼마 떨어져 있으니 속도를 줄여라'는 등 관제탑과 교신을 하는 게 주 업무다."

―이륙부터 착륙까지 비행은 모두 자동으로 이뤄지나?

"가능하긴 하지만, 이륙은 양력(揚力)을 받아 속도 변화를 시켜서 올라가야 하니까 조종간을 잡는다. 착륙을 부드럽게 할 때도 수동으로 해야 한다. 오토로 하면 쿵 떨어진다."

―역시 사람 손길이 닿아야 한다는 뜻인가?

"사실 쿵 떨어지는 '펌(firm) 랜딩'이 안전하다. 규정상으로 그게 맞는다. 많이 굴러가지 않고 브레이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지면에 거의 닿을 무렵 손으로 출력을 줄여주는 연(軟)착륙은 승객 서비스 차원이다. 이는 눈비가 오거나 활주로가 미끄러울 경우 자칫 '오버런(overrun)'을 하게 된다."

―이륙과 착륙 어느 쪽이 어렵나?

"조종사로서는 이륙시키는 순간이 어렵다. 가장 많은 연료가 적재돼있어 비행기가 최고 중량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약 이상이 생기면 치명적 위험이 있다. 착륙할 때는 출력도 작고 중량도 가벼워 편하다."

―하지만 착륙 과정에서 통상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것 같다.

"기상이 나쁘면 아예 이륙을 안 시키지만, 착륙 과정에서는 조종사가 무리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1993년 아시아나 733편의 목포공항 추락 사고(68명 사망) 때 비행기는 공항을 두 번 선회했다. 마침내 세 번째 착륙을 감행하다 부딪혔다."

―그런 무리한 결정에는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마음이나 자존심이 작용하는 걸까?

"정확한 지적이다. 위험과 싸우지 않고, 위험을 피할 줄 알아야 훌륭한 조종사다. 1989년 대한항공 803편 리비아 사고(72명 사망)를 냈던 조종사는 당시 공항에 안개가 꼈는데도 착륙을 시도했다. '늘 뜨고 내렸는데 이걸 못 해' 하는 마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조종사는 사고 10년 전에도 그랬다. 방콕 공항에서 비가 퍼부었을 때 다른 항공기들은 미얀마로 회항했지만 그만 착륙을 시도했다. 무사히 착륙했고 '역시 베테랑은 다르다'는 박수를 받았다. 그때 항공사에서 규정을 어긴 그를 징계했다면 대형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회항(回航)하면 승객들이 항의하고 난리를 피우지 않는가?

"우리 승객들은 항공기 지연과 회항에 과도한 항의를 하는 편이다. 이런 점도 조종사에게 회항을 주저하게 만들기도 한다."

―얼마 전 대한항공 비즈니스석 승객은 여승무원을 잡지로 치기도 했으니.

"그 승객의 행위가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항공사에 몸담았던 입장으로는 기장의 문제도 보인다. 미리 기내에서 엄한 주의를 주는 등 현명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결국 한 개인이 직장까지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되다시피 했다. 그럴 사안은 아니었다."

그와의 비행은 2시간 반 만에 끝났다.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 메스꺼움도 같이 가라앉았다.

▲29일자 A33면 〈최보식이 만난 사람-일흔네 살의 '현역' 서호선 기장〉에서 1000피트(600m)는 '300m'로, 익산군청은 '익산시청'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