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美) LA 공항, 이륙 10분 전.
비행기 옆 좌석에 낯선 남자가 앉아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읽고 있는 남자는 책 속의 활자에 열중하고 있다. "혹시 이것 말고, 하이네켄 있어요?" 취향이 분명한 남자는 까다롭다. 하지만 연애가 시작될지도 모르는 찰나, 그것은 스스로를 증명하는 증표처럼 자신을 빛나게 한다. 옆자리 여자가 그가 읽는 문장을 곁눈질한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그녀는 건조한 비행기 실내를 싫어한다. 제대로 책을 읽은 적도 없다. 그때는 솜이불 같은 구름에 잠겨 사라진 비행기 날개의 반쪽을 몽롱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보게 된 영화가 '500일의 썸머'였다. LA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비행기였고 우연히도, 영화 속 주인공의 연애 장소가 그녀가 한 달 동안 머문 '천사의 도시', LA였다. 그녀는 멀뚱히 조그만 모니터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20세기 폭스사 특유의 시그널 뮤직이 울리자마자 검은 바탕의 화면에는 이런 글자들이 소심하게 떠 있었다.
이 영화는 허구이므로, 살아있거나 죽은 사람과 어떤 유사점이 있어도 완전히 우연입니다.
특별히 너, 제니 벡맨
나쁜 년!
이건…, 흡사 감성이 뚝뚝 흘러넘치는 '안티 에쿠니 가오리' 진영의 작가가 썼을 것 같은 영화였다. 수다스러운 '요시다 슈이치'가 썼을 법한 연애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형용사나 부사 따위 용납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여전히 장황하기 그지없는 '스티븐 킹'의 이야기 본능에 '닉 혼비' 소설에 숱하게 나오는 나사 서너 개는 빠진 남자 캐릭터가 한두 명 등장하는 영화겠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 그녀는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을 바라봤다. 어둠이 점점 비행기 안을 감싼다. 영화를 보고 났는데도 아직 비행 시간은 6시간 이상 남아 있었다. 그녀는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책을 바라봤다. 몇 번이나 읽은 책, '여행의 기술'이었다. 옆 좌석의 남자와 같은 책. 그들은 우연히 '여행의 기술'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일까?
그녀가 '알랭 드 보통'의 책이 인천공항에서 유독 판매량이 많다는 걸 안 건 서점에서 일하는 친구에게서였다. 그건 꼭 한국적 상황도 아니었다. 전 세계 공항 어디에선가 그의 책은 쉴 새 없이 팔려나가고 있었다. 도쿄의 나리타에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에서, 런던의 히스로에서. 그건 도쿄와 암스테르담과 런던이 아닌 나리타와 스키폴과 히스로의 판매 부수였다. 사람들이 하늘을 날기 전, 그의 책을 선택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얼마간의 무거움을 동반한 적당히 낭만적인 가벼움. 몇 장 읽다가 잠들어도 좋을 아포리즘 몇 개. 그녀는 편견대로 그에 대한 문장 하나를 만들었다.
알랭 드 보통=공항의 음유시인.
인천공항 착륙 한 시간 후.
2010년 1월 4일. 공항에서 내려 창밖을 내다봤을 때,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풍경과 마주쳤다. 도시는 눈의 도시 삿포로 같았다. 비행기가 자신을 일본에 잘못 내려준 건 아닐까,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울은 거대한 흰 담요에 덮여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에 반팔 옷을 입고 할리우드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폭설로 교통이 마비된 서울을 보는 건 놀랍도록 몽롱하고 비현실적이었다. 한순간 재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엑스트라가 된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일어난 진짜 현실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지? 비현실적인 현기증 때문에 그녀는 잠시 공항 라운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연필 대신 눈으로 몇 문장에 밑줄을 쳤다. "지혜로운 여행사라면 우리에게 그냥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물어보기보다는 우리 삶에서 무엇을 바꾸고 싶으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텐데." 생각해보면 그녀는 늘 공항에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곳이 어디든, 공항보다 책을 읽기에 좋은 곳은 없다고 믿었다. 기대감은 책의 문장에 날개를 달아준다. 이제 곧 떠나리라, 이제 곧 바뀌리라 꿈꾸면서. 하지만 돌아오면 미몽 같은 생각들은 이제 현실의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여행은 끝났고 이제 너의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그녀는 빠르게 걸어가는 옆 좌석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결국 공항버스에서 내려 그녀는 집까지 무거운 짐을 끌고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산비탈에 사는 그녀를 집까지 옮겨주겠단 무모한 택시 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녀는 미끄러운 눈밭에서 무거운 짐을 끌며 끙끙댔다. 며칠 후, 그녀는 신종플루에 걸렸다. 그러니까 이건 비행기에서 멋진 남자를 만나는 달콤한 사랑 얘기가 아니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속에 나오는 사랑에 빠진 남녀 얘기도 아니다. 아무리 매력적인 남자라 해도,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 보고 있으면 신종플루에 전염될지도 모른다는… 뭐 그런 얘기에 가까운 것이다.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썼다면, 이 시대의 작가인 나는 '신종플루 시대의 사랑'이라도 써야 할 법한… 뭐 그런 쓸쓸한 얘기? 2010년, 마스크 쓴 사람들로 가득한 인천 공항에 아주 잘 어울릴법한 그런 얘기 말이다.
●여행의 기술: 이국적인 것의 매혹, 바베이도스의 바다 풍경에서부터 히스로 공항의 비행기 이륙에 이르기까지 여행의 가치를 알려주는 알랭 드 보통의 철학적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