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보〉(165~178)=초정밀도를 자랑하는 기계도 쉴 새 없이 돌리다 보면 고장 날 때가 있다. 하물며 인간에게 완벽함을 기대한다는 건 무리일지 모른다. 천하 고수(高手)라 해도 실수를 피할 수 없다는 뜻. 이 바둑은 아마추어들의 대국이고, 1인당 30분짜리 속기(速棋)다. 오락가락하는 승부 삼매경에 취해 있던 두 대국자가 이 장면서 예기치 못했던 해프닝을 합작한다.

백△가 지난 보(譜) 마지막 수. 초읽기에 쫓기다 절대 선수(?)를 행사하자 흑은 절에 간 색시처럼 165로 받아주었다. 한데 △와 165는 둘 다 헛수였다. 참고도를 보자. △ 때 흑이 손을 빼면 1로 늘 텐데, 4·6으로 파호(破戶)하면 10까지 하변 백이 두 눈(眼)을 못 낸다. 165는 상대 헛손질에 덩달아 박자를 맞춰준 셈. 두 대국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장을 옮겨 사투를 계속한다.

166 이하 170까지는 백의 기분 좋은 이삭 줍기. 171은 175로 끊겼을 때에 대비해 효과적으로 살겠다는 뜻이다. 172로 패(覇)를 기도해 굴복시키고 178로 넘은 것도 짭짤한 끝내기. 흑백 모두 '정밀 모드'로 복귀한 가운데 바둑은 종착역을 향해 치닫고 있다. 반집의 저울추는 아직도 방향을 못 정한 듯 좌우로 요동을 치고…. (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