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부양을 재촉하는 안팎의 목소리에도 긴축 정책을 고집해왔던 유럽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정치권을 비롯해 재계, 학계까지 반(反) 긴축 목소리가 커지면서 유럽연합(EU) 수장까지 가세했다. 통계 상으로도 지금껏 허리띠를 졸라맨 유럽 재정위험국들의 부채가 더욱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면서 유럽의 경제 정책 운영 방식에 변화가 나타날지 주목된다.
◆ EU 집행위원장 "긴축 한계 직면"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은 22일(현지시각) "긴축 중심의 경제 정책이 한계를 맞았다"고 말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싱크탱크 대상 컨퍼런스에 참석한 바호주 위원장은 "정책이 성공하려면 적절하게 설계되는 것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사회·정치적 지지를 얻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발언은 유럽 성장에 대한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시점에 나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주말 연례 총회에서 “유럽이 성장 주도 정책을 펴야 한다”는 공동선언문으로 압박했다. 또 “부채가 성장을 막는다”며 긴축을 강조한 하버드대의 유명 논문이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학계에서도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바호주 위원장의 발언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 집행위는 재정위험국이 긴축의 속도를 줄일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에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분석했다.
◆ 빌 그로스 "급한 긴축 경제 질식시켜"
세계 최대 채권펀드를 운용하는 빌 그로스도 거들었다. 그는 FT와 인터뷰에서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단기간에 재정긴축을 이행하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실수였다"며 "이제는 돈을 써야 할 때"라고 말했다. 유럽의 국가 부채에 대해 경고했던 지난 2010년과는 입장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그는 “장기적으로 검소하게 재정을 운용하는 것은 중요하며, GDP 대비 부채를 상대적으로 낮게 유지해야 하지만 문제는 이를 얼마나 빠르게 이행하는지 여부”라고 말했다. 선진국의 대규모 통화완화책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그는 “시장 참가자들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뿐 아니라 영란은행 및 유럽중앙은행(ECB), 일본은행의 팽창책이 결국에 어떻게 막을 내릴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로스는 앞으로 물가 상승에 대비해 미국 국채 비중을 높였다고 FT는 전했다. 3월말 현재 그로스가 운용하는 토탈리턴펀드에서 미국 국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에 달했다. 작년 7월 이후 가장 높은 것이다. 2년 전만 해도 그로스는 자신의 펀드에서 미국 국채를 모조리 뺐었다.
◆ 구제금융 4개국 중 3곳 빚 늘어
같은 날 EU 통계청은 "유로존 전반의 GDP 대비 재정적자는 2011년 4.2%에서 작년 3.7%로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각국 상황을 뜯어보면 상황은 달랐다. 스페인의 경우 은행권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 여파로 GDP 대비 재정적자가 같은 기간 9.4%에서 10.6%로 늘었다. 그리스는 9.5%에서 10%, 포르투갈은 4.4%에서 6.4%로 증가했다. 독일만 유일하게 흑자를 기록했다.
부채 상황도 마찬가지다. 구제금융을 받은 4개국(그리스·아일랜드·스페인·포르투갈) 중에서 작년 부채가 줄어든 곳은 그리스 밖에 없었다. 구제금융 지원 조건으로 강력한 긴축을 이행했는데도 빚은 늘었다는 뜻이다. 포르투갈의 GDP 대비 부채는 2011년 108%에서 작년 124%로 늘었고, 스페인과 아일랜드도 상황이 비슷했다. 그리스는 GDP 대비 부채가 170%에서 157%로 줄었지만 여전히 EU 국가들 중에선 최고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