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예술, 사랑과 자유의 도시 파리. 세계인에게 각인된 파리의 이미지 덕분에 프랑스 파리에서 촬영했다고 하면, 일단 ‘먹고 들어가는’ 장점이 있다. 여타 외국인들에게도 프랑스 영화는 ‘자막 달린 영화’로 연애시절 한번쯤은 꼭 함께 봐야하는 감각적 작품으로 손꼽히는데다가 로맨스 영화의 배경으로 곧잘 파리가 등장한다.
멕 라이언 주연의 ‘프렌치 키스’(1995), 케이트 허드슨·나오미 워츠 주연의 ‘프렌치 아메리칸’(2003), 프랑스 대표 여배우 줄리 델피가 출연한 ‘비포 선셋’(2004)이나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2007) 등 파리 로케이션 영화 대부분 일정 수준의 흥행성적을 냈다. 파리라는 이국적 배경에 대한 ‘로망’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인다.
서구문물을 향한 선망이 큰 일본에서도 파리는 빠질 수 없는 사랑과 예술의 이상향 같은 도시다. 영화 ‘도쿄타워’(2004)에서 20세 연상의 유부녀와 미대생의 사랑이 이뤄지는 곳도 결국 파리이고, 클래식을 소재로한 히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2006)의 후속으로 TV영화 ‘노다메 칸타빌레 인 유럽’(2008), 영화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2010) 등이 파리로 무대를 옮겨 촬영되기도 했다.
올해도 ‘비 러브드’, ‘해피 이벤트’ 등 프랑스 영화뿐 아니라 우디 앨런의 ‘로마 위드 러브’,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세 번째 만남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비포 미드나잇’ 등 유럽을 무대로 한 영화가 줄줄이 나오는 가운데, 파리에서 촬영한 두 편의 영화가 25일 동시 개봉한다. ‘냉정과 열정사이’로 유명한 소설가 영화감독 츠지 히토나리(54)와 결혼해 파리에 거주 중인 여배우 나카야마 미호(43)가 출연한 일본영화 ‘새 구두를 사야해’와 미국 소설가 더글러스 케네디(58)가 자신의 원작을 각색한 ‘파리 5구의 여인’이다.
◇산뜻하고 사소한 일본식 로맨스 ‘새 구두를 사야해’
‘새 구두를 사야해’는 ‘러브레터’, ‘4월이야기’ 등을 감독한 이와이 슌지(50)가 제작하고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류이치 사카모토(61)가 음악을 맡아 화제가 된 작품이다.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기타가와 에리코(52)는 ‘롱 베케이션’, ‘뷰티풀 라이프’ 등을 쓴 히트 드라마작가 출신이다.
파리에서 나오는 일본어 소식지에서 일하고 있는 에디터 아오이(나카야마 미호)가 우연히 마주친 포토그래퍼 센(무카이 오사무)과 호감을 나누며 설렘을 느끼는 3일 동안의 과정, 센의 여동생 스즈메(기리타니 미레이)와 파리로 유학온 화가 지망생 간고(아야노 고)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다가 결국 헤어지는 과정이 교차된다.
새 구두로 갈아신는 여성의 심리, 피아노, 웨딩드레스, 예쁘게 색칠한 부활절 달걀, 요리, 흰 레이스 커튼이 휘날리는 창가 등 온갖 로맨틱한 요소와 일본 드라마식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가 혼합돼 파리에 가고 싶다, 파리에 살아보고 싶다는 감상을 한껏 부풀리긴 하지만 파리 관광영화,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구성도 드라마 2~3회 정도를 이어 붙여놓은 듯 사소한 대사와 일화들만 쭉 나열되며 늘어지는 느낌이다. 일본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 설정들과 일본인 특유의 ‘닭살스러운’ 연기스타일도 답습하고 있어 감동도 반감된다.
너무 예쁘기만 한 그림 속에서 상업성과 예술성 사이에 갈등하는 센의 고민이나 아픈 과거를 품고 사는 아오이의 상처 같은 것들은 진정으로 와닿지 않는다. 게다가 마냥 어리광을 부리고 의존적이며 제멋대로인, 아시아에서만 가능할 듯한 스즈메 같은 여성 캐릭터는 은근히 짜증을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는 이젠 중년 티가 나서 띠동갑 연하 상대역과의 로맨스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도 몰입을 방해한다.
하지만 파리를 추억하고 싶은 관객, 파리에 가보고 싶은 관객, 여행 중 우연한 로맨스를 겪었거나 꿈꾸는 관객이라며 보고 공명할 부분들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파리의 뒷골목, 귀신에 홀린 작가 ‘파리5구의 여인’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라스트 리조트’(2000)로 신인감독상, ‘사랑이 찾아온 여름’(2004)으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바 있는 폴란드 태생의 파벌 파블리코브스키(56)가 연출했다. 원작소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과감히 쳐내고 주인공의 처지와 심정을 절제된 연출력과 퍼즐 같은 정교한 구성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낭만적이고 격조높은 파리의 중심부 대신 불법 이민자들로 들끓는 더럽고 칙칙한 파리의 뒷골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데 묘미가 있다. 접근금지 명령을 받고 별거 중인 프랑스인 아내와 딸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온 전 대학교수이자 소설가인 미국인 톰 릭스(에단 호크)는 도착하자마자 전 재산을 도둑맞고 불법이민자들이 사는 누추한 호텔에 묵으며 야간경비 일을 하게 된다. 호텔의 주인은 터키인으로 보이는 중동인, 이웃한 방의 무뢰한은 아프리카인이다.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금발의 글래머 웨이트리스는 폴란드에서 온 동유럽인.
그러던중 그를 알아본 서점주인으로부터 작가들의 모임에 초대 받는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그리워하는 것처럼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 같은 미국작가들, 각국의 예술가들이 모두 모여들었던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의 일면을 보여주나 했더니, 우아하고 지적이면서도 관능적인 연상의 여인 마르짓(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을 만나면서 ‘전설의 고향’같은 기괴한 분위기로 전환된다. 원한을 품고 죽은 귀신이 산 사람을 홀리고 술수를 부리는 스토리는 동양적 정서에도 잘 부합한다. 이러한 판타지는 파리라는 도시를 만나 한결 더 미스터리한 느낌을 덧입는다.
물론, 이 영화는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되는 이상을 품고 있다. 그 이유가 영화에서는 세세히 드러나지 않지만 갑자기 인생의 바닥으로 추락한 남자는 “진짜 나는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여기 홀로 있는 나는 슬픈 그림자인거죠”라며 자꾸만 꼬여가는 자신의 삶을 한탄하며 점점 더 흘러가는대로 자신을 맡기고 피동적이 돼간다. 그 외로움과 절망, 그 가운데서도 어린 딸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는 몸부림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여지가 있다.
매사가 불분명해 관객들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운 영화가 아닐 수 있다. 감독은 미로에 갇힌 듯한 주인공의 심정을 그렇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에단 호크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해 “이 인물 자체가 미로 속에 갇혀있다. 이 길로 들어갔더니 결국은 막다른 골목이고, 다른 길을 찾아보려니 자기가 어디로 들어왔는지조차 모른다. 이 영화는 살다 보니 나에게도 그런 상황이 있었다고 느끼는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