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식 베이징 특파원

이달 초 미국을 방문한 리셴룽(李顯龍) 싱가포르 총리는 백악관 오벌 오피스로 초대받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취임 후 여러 차례 미국을 찾았지만, 전례가 없는 일이다. 싱가포르 정부가 최근 프리덤호를 비롯한 미국의 최신예 연안 전투함 4척의 상시 주둔을 허용해준 데 대한 감사 표시였다.

빠른 기동 속도, 첨단 무기에 스텔스 기능까지 갖춘 이 최신 전투함의 싱가포르 배치는 아시아 복귀를 꿈꾸는 미국에 큰 의미가 있다. 남중국해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 중인 중국을 견제하면서 이 지역 제해권을 다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한 것이다.

싱가포르가 고심 끝에 미 해군 전투함 주둔을 받아들인 이유도 비슷하다. 싱가포르에 연해 있는 말라카 해협은 전 세계 해상 운송의 3분의 1 이상, 원유 수송량의 절반가량을 감당하고 있다. 중계무역항으로 부를 이룬 싱가포르에도 중국의 세력 확장은 이 지역의 기존 질서와 균형을 흔드는 위협 요인이다. 리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부상하는 중국에 대응하려면 미국이 더 나서야 한다"고 했다.

그런다고 싱가포르가 중국을 등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인구의 75%가 화교인 싱가포르는 중국 경제개발 초기에 홍콩과 함께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이 대중(對中) 투자를 했다. 2008년 일찌감치 중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고, 지난해 대중 교역량도 845억달러에 달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1991년 총리 사임 이후 거의 매년 중국을 찾아 중국 최고위층을 만나고 있다.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리 전 총리의 허물없는 친구였고, 시진핑(習近平) 주석도 이 원로 정치인을 깍듯하게 대하고 있다.

싱가포르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현실주의와 상호주의라는 외교 원칙을 일관되게 고수해왔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외교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이 나라 외교 기본 원칙의 첫째 항목은 '싱가포르는 소국으로서 지역과 세계의 상황에 환상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구가 되고자 하는 모든 나라는 우리의 우방'이라는 대목도 있다.

이 나라는 1990년대 초반 미군의 해·공군기지가 필리핀 수비크 만에서 쫓겨날 형편이 되자 자국으로 유치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이웃 대국 사이에서 버티려면 미군 주둔이 꼭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세계 무역 질서에 편입하려고 할 때는 적극 도왔다. 누구보다 앞서 중국에 투자하고, 중국 정부의 경제정책 자문역을 담당했다. 그 덕분에 급성장하는 중국의 등 위에 올라타 적잖은 실익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덩치가 커진 중국이 동남아 국가들을 윽박지르는 데는 단호하게 맞서고 있다. 역내 국가를 결집하고 미국·유럽을 끌어들여 견제에 나서고 있다.

인구 530만명 도시국가의 외교 방식을 우리나라에 곧바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소국의 외교 경험은 오래도록 중국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에게 두고두고 좋은 참고서가 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