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국립오페라단 올 시즌 개막작인 베르디 오페라 '팔스타프'의 막이 오르길 기다렸다. 하지만 불가리아 지휘자 줄리안 코바체프의 손짓에 따라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곡은 영국 작곡가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9번 님로드.

자막이 흘러나왔다. 지난 10일 칠레 출장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국립오페라단 후원회장 고(故) 이운형(66·사진) 세아그룹 회장을 추모하기 위한 연주라고 했다. '님로드'는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의 장례식 추모곡으로도 쓰인 곡이다.

이 회장이 즐겨 앉던 오페라극장 2층 B블록 1열 5번엔 백합과 국화로 꾸민 조화가 대신 자리를 지켰다. 부인 박의숙 세아네트웍스 사장과 동생 이순형 세아홀딩스 회장 등 가족, 국립오페라단 이구택 이사장, 김의준 현 예술감독, 김일곤 대원문화재단 이사장, 장세창 파워맥스 회장 등 후원회원들이 주변에 앉았다.

추모곡이 흘러나오자 모두 고인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 회장은 출장 직전 아내에게 "개막 공연 때 꼭 가서 손님들을 잘 모시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장례식 끝난 지 닷새밖에 안 됐지만, 아내 박씨는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다.

이 회장은 2000년부터 재단법인으로 새 출범한 국립오페라단 이사장을 지냈고, 2008년부터는 후원회장으로서 '오페라 전도사' 역을 해왔다. 이 회장의 권유로 오페라 후원자가 된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은 "'당신이 오페라 들으면 오페라 대중화의 절반은 이룬 셈 치겠다'며 CD를 건네주던 이 회장의 장난 어린 눈빛이 생각난다"고 추모했다.

21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2층 B블록 1열 5번 자리. 고 이운형 회장이 즐겨 앉던 자리에 국립오페라단에서 백합과 국화로 만든 조화를 놓았다.

이 회장의 세아제강은 국립오페라단을 지원하는 주(主) 스폰서를 맡아 작품마다 3000만~1억원 정도 제작비를 댔다. 오페라를 보고 싶어하는 직원들을 위해선 회사에서 따로 티켓을 구입했다. 그것도 가장 비싼 R석(15만원)으로만 샀다. '팔스타프'도 1억원어치 정도 구입했다. 신보현 국립오페라단 대외협력팀장은 "공연이 어렵다고 말씀드리면 그 자리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우리 표가 좀 안 나간다. 그 회사에서 공연 좀 보라'며 마케팅 직원처럼 티켓을 팔아주셨다"고 했다. 이런 활동으로 2009년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도 받았다.

이날 공연 팸플릿엔 국립오페라단 임직원 명의로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추모 글이 실렸다. "늘 따뜻한 눈으로 오페라를 바라봐주셨고 언제나 묵묵히 그리고 든든히 후원해주셨다. 고인의 영전에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를 바친다"고 썼다. 국립오페라단은 24일까지 계속되는 '팔스타프' 공연 시작 전, 이 회장을 추모하는 '님로드'를 매번 연주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