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서울 명동 후미진 골목의 한 채권회사 사무실. 한 처녀가 말 없이 커피잔을 닦고 있다. 싱크대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 국내 1세대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청경(52) 김청경헤어페이스 원장의 열아홉 살 모습이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고고하게 스타들 메이크업만 해준 것 같죠? 학비가 없어서 한 학기 만에 대학을 자퇴하고 돈을 벌기 위해 떠밀려 들어간 데가 명동 사무실의 사환 자리였어요." 20일 오후 서울 청담동에서 만난 김 원장은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가 있어서 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을 수 있었다. 독불장군처럼 앞만 보고 나가는 게 김청경 스타일"이라고 했다.

"성공하는 사람은 남 탓 안 해"

메이크업 전문숍 최초 개업, 메이크업 아카데미 최초 설립 등 김 원장의 이력엔 '최초'란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1982년부터 30년간 20만명 여성의 얼굴을 매만져온 그녀가 이번에 선보인 건 자전적 에세이 '김청경, 미(美)완성을 꿈꾼다'(휴먼큐브). 국내 뷰티 업계 선두 주자로 설 수 있게 물심양면 이끌어준 사람들과 비결 등을 담았다.

김청경 원장이 자신의 작업실 거울 앞에 앉았다. 30년 넘게 다른 사람들 얼굴을 아름답게 가꿔온 그녀가 요즘 기운 쏟는 일은‘겨자씨’봉사 활동. 엄마들 50여명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교복을 못 사 입는 아이들에게 교복을 맞춰준다.

절망에 잠겨 있던 그녀를 북돋워준 사람은 당시 명동성당의 한 신부님이었다. "저만 보면 '꼭 대학에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깨달았죠.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건 아버지 사업이 갑자기 망해서도 아니고, 제 밑으로 동생이 넷이어서도 아니고, 쉽게 손 놔버린 제 실수란 걸요."

1982년 명동 사무실을 그만두고 서울예전 방송연예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취직한 데가 KBS 분장실. 휴일도 반납하고 꼬박 360일을 일했다. 드라마를 떠나 광고로 옮겨갔다. "지금처럼 조명·카메라가 좋은 시절이 아니어서 잘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의 차이가 명백했어요. 눈썹을 맵시 있게 칠하고 입술선을 정교하게 그려넣으면 감독들은 막연히 '어, 예쁘다. 잘했네' 칭찬했죠."

"동양인만의 조촐한 아름다움"

1987년 한 달 수입이 600만원이었다. 그 후 7년간 김 원장은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영원한 1등은 없다. 광고 메이크업 일을 독식하자 시기와 질투가 따라붙었다. 더 젊고 실력 있는 후배에게 밀려날까 봐 불안했다. 1997년 밀라노의 메이크업 학교에 등록한 후 기초부터 다시 배웠다. 서양의 단순한 메이크업은 베테랑 그녀를 부끄럽게 했다. "우리 화장은 두꺼웠어요. 서양인처럼 보이고 싶어서 콧대를 세우는 셰딩만 발달해 있었죠. 동양인은 평평한 이목구비 안에 아름다움이 있는 건데…."

밀라노에서 일종의 '문화충격'을 받고 돌아온 그는 영화 쪽 조명 관련 책을 찾아보며 빛 반사의 기본 원리를 깨쳤다. 얼굴의 옅은 주근깨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조명을 가하면 화면에 보이지 않았다. 적은 양의 파운데이션을 이마와 콧대, 눈 주변에만 엷게 펴 바르고 주황색 아이섀도로 입체감을 살렸다. '누드 메이크업'은 국내 메이크업의 판도를 바꿨다.

최진실·김희애·심은하·김정은·김남주·송윤아·송혜교 등 그녀의 손을 거쳐 간 배우들 대부분은 톱스타가 됐다. 하지만 상처 받을 때가 있다. 김 원장은 "그건 마음으로 받는 보상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했다. "오래전 제가 만들어준 이미지로 단박에 톱스타가 된 여배우가 있어요. 그런데 말 한마디 없이 다른 숍으로 옮겼어요. 왜 떠났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좀체 알 수가 없었죠. 그래서 말이라도 '고맙다'고 해주는 배우들 보면 더 잘해주고 싶어요." 김 원장은 "나는 섀도(그림자)다. 내 손이 복손이어서 내가 만져주면 좋은 일이 이뤄진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