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섬나라 키프로스의 구제금융 방안을 둘러싸고 유럽연합(EU)과 러시아가 충돌하고 있다.

키프로스 의회는 19일(현지 시각) EU와 정부가 내놓은 '예금 과세'가 포함된 구제금융안을 반대 36표, 기권 19표로 부결했다. 금융 위기에 직면한 키프로스 정부는 EU 등 국제 채권단과 100억유로(14조원)의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은행예금액에 따라 6.75~9.9%를 차등 과세해 58억유로(8조3500억원)의 추가 구제기금을 마련하기로 합의했었다.

키프로스 국회의원들이 19일(현지시각) 수도 니코시아 의사당에서‘예금 과세’가 포함된 구제금융안을 놓고 표결하고 있다. 이날 키프로스 의회는 예금자 반발과 뱅크런 사태를 우려해 구제금융안을 반대 36표, 기권 19표, 찬성 0표로 부결했다.

표결에서 집권 민주연합당(DISY)조차 단 한 표의 찬성표도 던지지 않은 배경에 러시아의 힘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키프로스 은행예금 총 700억유로(100조원) 가운데 35%가량이 러시아 자금이다. 이 구제금융 방안이 통과된다면 러시아 거액 예금자들은 꼼짝없이 세금을 내야 할 상황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가 친(親)러시아 성향 의원들을 움직여 구제금융안을 부결했다는 것이다. 투표 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는 "키프로스 은행의 예금 과세는 옛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에서나 하던 관행으로 러시아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라며 구제금융안을 강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독일 주도의 유로존은 구제금융이 키프로스 내 러시아 예금자에게 흘러들어 가는 것을 그냥 둘 순 없다며 '예금 과세' 방안을 고집하고 있다. 키프로스 은행에 있는 러시아 자금을 보호하기 위해 자국민의 세금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키프로스 금융규제안을 주도하고 있는 독일의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은 '예금 과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키프로스 은행은 영원히 영업을 재개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구제금융안 부결로 디폴트(채무상환 불이행) 상황에 놓인 키프로스는 러시아에 손을 내밀고 있다.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디스 키프로스 대통령은 19일 늦은 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긴급 전화를 걸고,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 재무장관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2011년 말 키프로스에 25억유로(3조6000억원)의 차관을 제공한 러시아도 키프로스의 파산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형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키프로스를 통한 금융 거래가 중단되면서 러시아 기업이 키프로스를 거쳐 진행 중이던 대규모 기업 인수·합병(M&A)이 중단됐다고 보도했다. EU도 키프로스가 러시아 경제권에 편입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키프로스 주변 해역에 매장된 천연가스와 석유 개발도 EU에는 매력적이다.

이 때문에 독일 주도의 EU와 러시아의 대립이 확전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웨스턴 시드니 대학의 스티브 킨 경제학 교수는 미국 CNBC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예금자가 타깃인 상황이 계속되면 푸틴 대통령이 '강한 남성' 이미지를 앞세워 반격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며 "러시아가 독일에 가스 공급을 중단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키프로스에서 영향력이 큰 정교회 수장인 크리소스토모스 2세 대주교는 국가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해 교회 재산을 정부 처분에 맡기겠다고 말했다고 AP통신이 20일 전했다. 크리소스토모스 2세 대주교는 이날 아나스타시아디스 대통령을 만난 뒤 "정교회는 국채에 투자하기 위해 기꺼이 교회 자산을 담보 형태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키프로스 정교회는 부동산과 은행·양조장 지분 등 상당한 자산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