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대면 알만한 미국 기업들이 거래를 하자며 연락해 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가던 KDB산업은행 김재익 뉴욕지점장의 톤이 순간 높아졌다. 그는 "그동안 외국은행과는 경쟁이 안됐었는데 그게 작년부턴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며 "신용등급이 높아지면서 조달금리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유럽계 대형은행들이 휘청거리는 사이, 국내은행들이 높은 신용등급을 받으며 약진하고 있다. 세계 금융 중심지 뉴욕에서도 마찬가지다. 금융위기 당시 미국 4대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던 KDB산업은행. 결국 리먼 인수는 해프닝에 그쳤지만 이후 위상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KDB는 지난해 8월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로부터 한 단계 격상된 Aa3의 신용등급을 받았다. 이는 일본의 도쿄미쓰비시나 영국 HSBC 등과 같은 등급이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JP모건체이스나 도이치방크 보다는 두 단계나 높다.
지금 대부분의 글로벌 투자은행들은 KDB를 비롯한 국내 주요 은행들보다도 신용등급이 낮다. 골드만삭스와 바클레이즈, 코메르츠방크 등은 A3, 모건스탠리와 RBS는 Baa1 수준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씨티는 이보다 더 낮은 Baa2다.
물론 신용등급만 가지고 모든 것을 비교할 수는 없다. 자산규모 150조원 규모의 KDB산업은행과 9500억달러(약 1050조원)에 달하는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하는 일이나 규모, 범위, 네트워크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과 한국의 금융사, 투자기관을 보는 외국 금융인들의 눈이 달라졌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뉴욕에서 만난 현지 펀드매니저들은 한국 국민연금의 행보에 대해 궁금해 했고, 한국과의 거래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한국 주식시장에 대해 분석을 의뢰하는 움직임도 잦아졌다. 지난해 미국 전문투자자들의 포럼인 '가치투자회의(value investing congress)'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강연자로 나섰던 용환석 페트라투자자문 대표는 "외국 투자자들이 추가 수익을 낼 수 있는 시장으로 한국을 꼽고 있다"며 "한국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계의 월가 진출이 빠르게 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현지에서는 놀라움 반, 호기심 반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특히 응용수학, 금융공학 등을 전문으로 하는 퀀트 분야에서는 중국과 인도계 다음으로 한국계가 가장 많다고 현지인들은 말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뉴욕 총영사관은 뉴욕에서 일하는 한국계가 적어도 1000명은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계 금융인 모임인 코리아파이낸스소사이어티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인사만 400명선에 달한다고 한다.
송병선 뉴욕총영사관 재경관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학도 잘하고 머리도 좋고 하다보니 뉴욕 금융가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라며 "무엇보다 금융은 부지런해야 하는 데 그런 쪽에 있어선 미국사람들보다 훨씬 탁월하다"고 말했다.
송 재경관은 최근 겪었던 일화를 들려주며 언젠가 월가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얼마전 현대차 공장이 있는 몽고메리시(市)에 갔었는데요. 거기에선 몽고메리를 몽구메리로 부른다고 하더라구요. 정몽구 회장이 한 번 뜨면 주지사, 상원의원 다 나온다고 해요. 현대차가 사실 그 도시 하나를 먹여 살리는 거나 마찬가지죠. 월가에서도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뉴욕 금융시장을 한국인이 꽉 잡고 있으면 경제 뿐만 아니라 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송 재경관의 말에는 기대 이상의 힘이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