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세계에서 금녀(禁女)의 영역은 이미 오래전 무너졌다. 당장 올 초만 해도 '최초' 타이틀을 단 여성 리더가 여럿 배출됐다. 지난달 27일 고유미(34) 경정은 해양경찰 창설 60년 이래 최초의 여성 함장으로 부산해양경찰 경비함 1513호에 올랐다. 지난 25일엔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취임했다. 1만5000여 명의 미국 여성 노동자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던 1908년 3월 8일(세계여성의날 제정의 계기가 된 사건) 당시와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 인력 진출이 미미한 분야가 있다. 의학·과학·공학 등 이과 계열이 바로 그것. 이에 맛있는공부는 세계여성의날 105주년을 앞두고 '이과 여고생과 그들의 롤모델 간 만남'을 기획했다. 지난 8일엔 김혜림·이혜성(이상 서울 세화여고 2년)양이 김지훈(36)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연구원을, 18일엔 손지연·정혜나(이상 서울 건국대사범대학부속고 1년)양이 심정호(38)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 임상강사(외과전문의)를 각각 찾았다.
◇여성 공학자ㅣ남성에 뒤지지 않는 '체력' 갖춰라
김지훈 연구원이 대학(충남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할 당시 동기 80명 중 여학생은 그를 포함, 달랑 두 명이었다. 그가 올해로 10년째 몸 담고 있는 나로호 발사체 연구팀 200명 중에서도 여성 연구자는 13명에 불과하다. "어느 집단에서건 소수가 적응하는 건 쉽지 않아요. 저 역시 남성 특유의 대화 주제나 문화가 익숙지 않았죠. 기계로 재료를 깎고 용접기를 들며 체력의 한계도 느꼈고요. 하지만 성실성이나 학업 성취도 면에선 여학생이 월등했어요. 제 과제를 베껴가는 남학생도 많았죠."(웃음)
김 연구원이 공학계열 학과에 진학한 덴 아버지 김유(69) 전 충남대 기계공학과 교수의 영향이 컸다. 어린 시절 그는 기름때를 묻힌 채 밤새워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마냥 보기 좋았다. "롤모델을 반드시 같은 성별로 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출산·육아 등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나 단체에 도움을 청하는 게 좋아요."
이혜성양은 육아와 일을 겸할 수 있는 노하우를 궁금해 했다. 김 연구원은 "'내가 일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이에게도 좋을 것'이라며 늘 주문을 왼다"고 말했다. "막내가 생후 10개월쯤 됐을 때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근무했어요. 얼마 전 막내가 직접 그린 우주선 그림을 내밀며 '나도 엄마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사회인으로 성공한 엄마는 자녀에게도 분명 긍정적 영향을 끼칠 거란 게 제 생각입니다."
◇여의사ㅣ섣불리 한계 짓지 말고 부단히 노력해야
위장관외과가 전공인 심정호 강사는 위암 관련 수술을 주로 집도한다. 손지연양은 그에게 '힘들기로 소문난' 외과 선택 계기를 물었다. "사실 처음엔 공대에 갔었어요. 제 성향과 맞지 않아 재수를 거쳐 다시 의대에 진학했죠. 처음부터 외과의를 꿈꾼 건 아니었는데 인턴 시절 외과에서 일하며 다른 어떤 분과에서보다 보람을 느꼈어요. TV 의학 드라마에서처럼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가 많지 않아 '이 정도면 할 만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웃음)
심 강사에 따르면 최근 의예과 입학생은 물론, 외과전문의 중에도 여성 비율이 증가하는 추세다. 그는 "로봇수술 도입으로 '힘 써야 하는' 수술이 줄어든 데다 환자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여의사가 더 뛰어나 (외과 분야에서 여의사) 수요가 높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요즘은 여의사에게도 남성 못지않은 강인함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만 해도 인턴·레지던트 시절엔 집에 못 가는 날이 허다했습니다. 임신 중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못 먹으면서 16시간을 꼬박 근무한 적도 있고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버텼어요. 제가 일을 미루면 그만큼 동료가 고생하는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알았거든요."
정혜나양도 심 강사에게 '주부'와 '직업인' 간 균형을 어떻게 맞추는지 질문했다. 심 강사는 "남편의 외조 덕을 많이 보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은 절 아내나 엄마이기 이전에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해주는 편이에요. 물론 두 가지 일을 병행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굳은 의지예요. 해보기도 전에 '(누군가의)엄마이자 아내'란 이유로 한계를 짓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