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강의실 뒤편에서 캠코더가 돌아간다. '동영상 강의'를 인터넷에 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녹화를 하고 있는 사람은 출판사 직원. 한 학기 혹은 1년짜리 강의를 책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말이 책이 되는 시대, 이젠 스타 강사들의 강연 내용을 책으로 엮는 단계를 넘어 대학교 강의가 그대로 책으로 나오고 있다. '대학 강의를 책으로 옮기기'는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스튜어트 다이아몬드) '죽음이란 무엇인가'(셸리 케이건) 등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의 인기 강의를 묶은 책들이 최근 3년간 국내 출판시장을 달군 것이 촉매제가 됐다. 국내 출판사들 사이에서도 '명강의 찾기' 경쟁이 시작됐다.
◇"교수 저자를 찾습니다"
21세기북스는 지난해 12월 '국내 교수 저자 발굴'을 위해 전담팀을 꾸렸다. 주요 대학의 인문학 교수가 진행하는 교양강의 중 일반 독자들이 흥미로워할 주제를 선별, 강의 전체를 녹취해 책으로 묶는다는 계획. 국내 출판계에서 교수 저자의 강의를 물색하는 전담 부서를 만든 건 처음이다. 타깃은 ▲인문·철학·역사·심리·사회과학 분야 ▲40대 후반~50대 중반 교수의 ▲전공 수업이 아닌 교양 강의.
주명석 본부장은 "자신만의 연구 성과물이 나오기 시작하되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신선한 교수 저자를 발굴해 인문서 시장을 넓히는 게 목표"라며 "맨땅에 헤딩하듯 전체 교수들의 홈페이지와 프로필부터 샅샅이 검토했고 강의 내용을 살펴본 후 직접 만나보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2학기에는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의 '행복론' 강의 전체를 촬영해 녹취를 끝냈고, 올해 1학기 강의까지 녹취한 후 상반기 중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휴머니스트 출판사도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의 '한국문학사' 강의를 2권짜리 책으로 낸다. 학부 4학년을 대상으로 한 교양 강의 전체를 녹취한 원고를 바탕으로 정 교수가 보완 집필 중이며 내년에 출간된다.
대학 교수 스스로 출판을 염두에 둔 강의를 진행하기도 한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는 교수들의 강의록을 묶어 '인류 문명을 만든 핵심 개념 100' 시리즈를 출간할 계획. 이영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양교육연구소장은 "후마니타스칼리지의 강의는 실용주의 교육에만 치우쳤던 대학 강의에서 벗어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기본적 가치를 가르치자는 것"이라며 "그 강의록을 우리 학생뿐 아니라 인문교양적 가치에 목마른 일반 독자들에게도 전달하자는 취지"라고 했다.
◇왜 교수들의 강의록인가
국내에서도 대학 강의록 출간은 2000년대 후반 이후 꾸준히 시도돼 왔다. 2008년 출간된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책갈피)는 최 교수가 2002~2005년 서울대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 실제 강의처럼 학생 질문과 교수 답변도 실렸다. 글항아리 출판사의 '서울대 명품 강의 1·2'는 2009~2011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석학 강좌를 엮은 책. 돌베개의 '석학 인문 강좌' 시리즈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한 강좌를 책으로 옮긴 것으로 현재 20권까지 출간됐다.
최근의 강의록 출간 붐은 '글쓰기의 벽'을 낮추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대학 교수들이 가진 콘텐츠는 우수하지만 이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글로 풀어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 명강의로 이름난 교수라도 글솜씨는 그에 못 미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글쓰기의 벽을 낮추는 데는 '강의록 책'이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는 "깊이는 유지하면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형태가 입말을 풀어 쓴 강의식 구어체"라고 말했다.
교수 사회에서 대중서 출간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것도 요인.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는 "과거엔 학자는 학술서나 학술논문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시각이 많았다면 최근엔 대중서로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알리는 데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올해 1학기 '상담의 이론과 실제' 강의를 촬영해 책으로 엮을 예정인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그동안은 연구에 대한 압박 때문에 대중서를 낼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최근 부모·직장 상사와의 소통문제 등 일상에서 심리 상담의 필요성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지는 걸 보고 출간을 결심했다"고 했다.
◇독서의 연성화는 경계해야
'가벼운 독서'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최근 불경기가 심해지면서 출판사들이 쉽고 가벼운 인문서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한 것 같다"며 "강의 형식도 좋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내용의 충실성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영 로도스출판사 대표는 "삶과 인간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하게 만드는 게 인문학의 역할인데 그런 부분을 갖추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