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자연공원을 훼손했다고 볼 수 없고, 묘지 외의 구역에 '매장'을 금지하는 장사법(葬事法)을 어겼다고 볼 수도 없다. '매장'과는 구별되는 '자연장'으로 봐야 한다."

7일 오전 10시 30분쯤 대구지법 신별관 202호 법정.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자 유족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몇몇은 눈시울을 붉혔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판사에게 허리를 굽혀 "감사합니다" 하며 절을 했다. 대학 입학을 앞둔 딸(당시 18세)을 잃었던 황명애(56)씨는 "10년 동안 무덤 하나 만들어주지 못했던 딸에게 이제 엄마의 도리를 한 것 같다"며 울었다.

이날 재판은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희생자대책위원회 윤석기(48) 위원장의 항소심이었다. 지난 2009년 10월 희생자 유골 29기를 대구 팔공산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 몰래 묻은 혐의로 1심에서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은 그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유족들은 화장한 골분을 묻고 다시 잔디를 덮어놨고, 아무런 표시 시설도 하지 않았으므로 자연공원법·장사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몰래 묻은 행위의 잘잘못을 가리는 재판이었지만, 유족들에겐 2003년 2월 18일 참사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추모공원에 모시고자 했던 염원이 꼭 10년 만에 이뤄진 셈이다.

2009년 10월 한밤중에 희생자 유골 29기를 몰래 묻은 유족들은 매년 이맘때 이곳을 찾는다. 참사로 자녀를 잃은 어머니 5명이 작년 10월 유골을 묻은 곳을 찾았다. 어머니들은 몰래 묻은 아이의 유골 앞에서 절을 하다가 슬픔과 설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통곡했다.

"다시는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추모 묘역을 추진했는데 외면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성금도, 위로도 아끼지 않은 국민께 늘 감사했지만, 이면의 님비 현상을 보며 참 가슴 아팠습니다." 어머니(당시 57세)를 잃고 7년 6개월 동안 대책위 사무국장을 맡았던 황순오(46)씨는 "지난 10년 동안 유족들은 지치고 힘겨워 뿔뿔이 흩어졌다. 비록 29기뿐이지만 희생자 192명 모두의 추모 묘역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대구시의 참사 희생자 추모 사업 차질이 원인이었다. 유족들은 참사 직후 개인적인 보상(사망자 1인당 2억2100만원)과 별도로 추모 사업(안전테마파크·추모탑·추모묘역 등)을 요구했다. 대구시는 약속을 했고, 참사 발생 4개월 뒤인 2003년 6월 29일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그러나 추모 사업은 대지 선정부터 막혔다. 중구·수성구·달성군 등 여러 곳을 찾았지만 주민들 반발이 만만찮았다. 5년을 넘게 끌다가 결국 동구 팔공산 동화지구에 터를 잡고, 2008년 12월 체험 시설 등을 갖춘 '시민안전테마파크'를, 이듬해 12월 '안전을 상징하는 조형물(일명 추모탑)'을 세웠다. 하지만 '추모'라는 글자는 모두 빼야 했다.

이러는 사이 유족들은 서서히 흩어졌다. 유골은 선산(先山)에 매장하거나 사찰·개인 묘지 등으로 분산됐다. 추모탑 제막을 앞둔 2009년 대책위는 대구시에 "수목장(樹木葬)이라도 해달라"고 요구했고, 시는 공원 주변에 나무 192그루를 심기도 했지만 인근 주민 반발로 묘역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묘지가 결정되지 않은 희생자는 70여명. 대책위는 이 유족들을 모아 "우리끼리라도 추모탑 인근에 묻자"는 의견을 냈다. 유족 29명은 찬성했고, 나머지 유족은 "공식적으로 묻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반대했다.

10월 27일 새벽 2시 유족 40여명이 버스에 올랐다. 유골을 하얀 한지(韓紙)에 싸서 품에 숨겼다.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에 손전등을 비춰가며 가로·세로 1m 크기 구덩이 2개를 파서 재빨리 묻었다. 그러고는 "죄지은 듯 이렇게 몰래 모실 수밖에 없어 죄송하다"며 추도문을 읽었다. 모두가 울었던 그날이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이 났고,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대구시는 결국 윤 위원장 등 대책위 간부 3명을 고발했다. 윤석기 위원장은 "당시 대구시도 '수목장을 위한 산골(散骨·뼛가루를 흩어버리는 장례 방식)'은 괜찮다고 했다. 다만 주민들과 마찰을 피하려고 밤에 묻었을 뿐"이라며 "약속을 어긴 대구시가 과오를 감추려고 되레 유족을 고발했지만, 재판부가 원칙을 바로 세워 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