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고재일 상병은 1968년 1월 24일 강원도 철원에서 전사(戰死)했다. 사흘 전인 1월 21일 청와대 습격에 실패하고 도주하던 북한 무력부 총정찰국 124군 소속 특수부대원들과 교전을 벌이다 총탄에 맞아 숨졌다. 전봉금(99)씨에게는 6·25전쟁 때 잃은 남편과 두 아들에 이어 마지막 남은 아들마저 떠나보낸 날이 됐다.
전씨의 남편 고천만씨는 전남 담양의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아들 셋에 딸 둘을 둔 가장이었다. 6·25전쟁 때 북한군이 고씨 마을에 쳐들어와 식량을 빼앗았다. 고씨 집에 먹을 것이 없자 고씨를 데려갔다고 한다. 큰딸 정순(74)씨는 "그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지 몰랐다"고 했다. 2년 후 아버지 시신은 마을 앞산에서 발견됐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동네 사람이 나무하러 갔다가 찾았다고 한다. 아버지를 따라 둘째와 셋째 아들도 저세상으로 갔다. 영양실조로 죽었다고 한다. 정순씨는 "그때는 전쟁 통에 워낙 사람들이 많이 죽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며 "그래도 어머니는 맏아들 재일이라도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라고 여기셨다"고 했다.
전봉금씨는 1968년 1월 아들이 전사한 강원도 철원을 찾았다. 전씨는 그 후 아들 얘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식구들은 전씨가 "아들 사진 보고 우는 게 안타까워" 고 상병의 사진도 모두 감췄다고 한다. 전씨는 매년 1월 21일이나 현충일이 되면 아들의 묘비가 있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10여년 전부터 그마저 못하게 됐다.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됐기 때문이다. 전씨는 지금도 몸이 아플 때마다 "재일아, 재일아"라고 중얼거린다고 했다. 정순씨는 "어머니는 억울하고 화나도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어 속으로 끙끙 앓으셨다"며 "지금까지 정부에서 누가 찾아오거나 위로 편지를 보낸 적도 한 번 없다"고 했다.
고(故) 김용열 하사는 제주도 출신이다. 가라데를 잘해 26사단 76연대 3대대의 '캡(특수)소대'에 뽑혔다고 한다. 그는 1·21 무장공비 소탕 작전 당시 인왕산에 헬기로 투하됐으며, 이후 경기도 의정부시 사패산에서 교전 중 전사했다. 그의 동생 김용희(50)씨는 형을 생각하며 해병대 장교(ROTC 12기)로 4년 동안 군 복무를 했다. 김씨는 "형 때문에 가족 모두 군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이 크다"며 "내 아들도 공사에 들어갔다"고 했다.
김씨는 3년 전쯤 형이 전사한 지역을 찾았다. 김씨는 "원래 형이 전사한 곳이 경기도 양주인 줄 잘못 알고 있었고, 현충원 묘비에도 그렇게 돼 있었다"며 "최근에야 바로잡았다"고 했다. 계급도 상병으로 잘못 표기돼 고쳤다고 한다.
1·21 사태로 전사·순직한 군인과 경찰은 모두 35명이다. 군에 따르면, 35명 중 15명의 경우 유족이 모두 사망했다. 2명은 유족을 찾지 못하고 있다. 군은 올해부터 전사자 묘역 공식 참배 및 유가족 위문 행사를 열기로 했지만 이들 대부분의 사진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군 관계자는 "군 내부에서도 1·21 사태가 잊힌 과거가 되고 말았다"며 "지금부터라도 관련 자료를 확보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했다.
당시 1사단 15연대장이었던 고 이익수 대령(준장 추서)은 무장공비 20m 앞까지 돌격했다가 전사했다. 그의 2남3녀 중 첫째딸인 명숙(71)씨는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때 전사한 이들도 1·21사태처럼 그 유족들에게만 기억될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