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그리고 SK 와이번스'라는 책이 감독실 탁자에 놓여 있었다. SK 감독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 세 번을 일군 김성근 현 고양원더스 감독의 야구론이 담긴 해설서였다. 책 주인은 염경엽(45) 넥센 신임 감독이었다. 17일 목동야구장에서 만난 염 감독은 "야구 관련 책은 좀 읽는 편"이라면서 "저도 그동안 모은 자료를 가지고 책을 써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염 감독은 역대 한국 프로야구 사령탑 중 가장 '스타성'이 떨어진다. 스스로 "프로선수 시절 성적은 초라하다"고 할 정도다. 2000년 현대에서 은퇴하고 난 다음엔 주로 구단 운영팀, 스카우트팀 등에서 프런트로 일했다. 지도자 경력은 현대, LG, 넥센 코치로 일했던 3년이 전부다. 하지만 야구를 분석하려는 노력은 선수 시절부터 계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야구판에서 밀려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애국가 듣다 눈물 쏟은 사연
1996년 4월 13일 인천 홈 개막전. 현대 염경엽은 비참한 기분이었다. 1991년 태평양(현대의 전신)에 입단한 이후 처음 개막전 선발 출전 명단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경기를 앞둔 현대와 LG 선수가 모두 그라운드로 나와 팬들에게 인사를 했다. 도원구장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염경엽은 눈물을 쏟았다.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하더라고요. 애국가 중간에 혼자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주전 선수였던 앞선 5년은 달콤했다. 타율은 1할대에 머물렀어도 수비와 주루 능력으로 인정받았다. 1994년엔 유격수로 119경기(총 126경기)를 뛰면서도 실책이 8개에 불과했다. 그 무렵 야구 인기는 치솟고 있었다. 1990년에 300만 관중을 돌파하고, 1995년엔 500만명을 넘어섰다. "집에 가면 학생 팬 수십명이 기다리지, 어디 가도 연예인 대접받지…. 그 맛에 젖었죠."
선수 염경엽의 입지는 1996년 유망주 박진만(현 SK)이 데뷔하면서 좁아들었다. 아마추어(광주제일고·고려대) 때부터 후보인 적이 없었던 그가 주전에서 밀려난 것이다. "처음엔 김재박 감독 원망 참 많이 했죠. 진만이도 미웠고…. 하지만 내 잘못이었습니다. 5년 동안 1할 타자였고, 보여준 게 없었으니까요."
그는 '백업(후보)으로라도 1등을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열심히 주루, 번트 연습을 했다. 벤치에서 상대 투수를 분석하고, 감독들의 전략을 메모하는 습관을 들였다. 1995년부터 5년간은 거의 대주자, 대수비 요원으로 뛰었다.
◇"감독은 천운… 결과로 말하자"
프로 10년을 채우고 2000년 겨울 은퇴한 그는 현대 2군 매니저를 거쳐 2001시즌 운영팀 직원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선수 출신으로 처음 프런트 일을 하게 돼 책임감을 가졌죠.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사람 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습니다. 연봉 협상하면서 선수들 마음도 알게 되고요."
그는 2006년 말 김시진 코치가 현대 감독으로 승격하면서 수비 코치로 1년을 일했다. 현대가 2007시즌을 끝으로 문을 닫으면서 2008년 LG로 옮겨가 스카우트팀과 운영팀, 수비 코치를 거쳤다. LG 운영팀장 시절엔 팬들로부터 '선수단을 손에 쥐고 흔든다', '구단 내 정치에만 관심이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정말 억울했습니다. 중학생이던 딸이 학교 다녀와서 '애들이 아빠 욕하더라'라는 말까지 하더군요."
그는 2011년 말 LG에 사표를 낸 얼마 후 '친정' 격인 넥센으로 돌아와 작전, 주루 코치를 맡았다. 2011시즌 팀 도루 꼴찌였던 넥센을 2012시즌 도루 1위 팀으로 올려놨다. 도루와 거리가 멀었던 박병호·강정호도 도루 20개를 할 줄 아는 호타준족의 선수로 변신시켰다.
염 감독은 작년 9월 김시진 감독(현 롯데 감독)이 갑자기 물러나면서 지휘봉을 잡았다. 김 감독이 불러서 넥센으로 왔던 그는 '나도 팀을 옮겨야 하나보다'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새 감독이 오면서 코치진이 물갈이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염 감독은 "세 구단이 절 코치로 오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넥센 구단주와 만난 자리에서 뜻밖에도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 충격이었다. "제 야구 인생의 목표는 수석 코치였거든요. 한국은 저처럼 스타 선수 출신이 아닌 사람이 감독하는 문화가 아니니까요. 제가 감독이 된 건 천운이죠."
염 감독은 20일 선수단을 데리고 미국 애리조나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그는 "올해 초보 감독 티를 내겠지만 시간을 투자하고 준비해 1승씩 채워가다 보면 결과가 나올 것"이라면서 "이번 시즌이 끝나고 나를 평가해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