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작가들이 일산에 대거 거주하게 됐는지 그 기원에 대해 나는 모른다. 일산이라는 곳이 대규모 신도시이고, 작가와 신도시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 때문이다. 출판사가 하나둘 홍대에서 파주 출판도시로 이동하고 나서부터 일산에는 더 많은 작가가 살기 시작했다. 나 역시 결국 작업실을 일산으로 옮겼는데, 이런 식이다. 하품을 하며 편의점에 뭔가를 사러 가다가 소설가 K와 마주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빙판길을 뒤뚱거리다가 시인 J를 발견하게 되는 식. 물론 작가들이란 민얼굴의 민망함을 아는 존재들이라 서로 아는 척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기 나름이지만 말이다.

은희경의 소설 '태연한 인생'의 요셉은 일산에 산다. 하지만 그는 생명력이란 말이 지닌 단세포적인 삶의 긍정을 어처구니없어했고, 방에 시계가 없는 이유 역시 어떤 종류의 살아 있는 것과도 방을 쓰기 싫기 때문일 만큼 시니컬하다. 가령 하늘은 요셉이 자연 형태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인데, 이유가 비 오는 날을 빼고는 소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 요셉은 작업실이 있지만 카페를 전전하며 노마드적인 글쓰기를 시작한다. 일산의 카페에 대한 그의 평가는 꽤 인상적인데, 주부들이 모이는 시간과 직장인과 커플들이 출몰하는 시간, 음악, 커피 맛, 리필 유무, 사이드 메뉴 등으로 분별되며 세분화된다. 물론 그가 떠도는 이유는 자신의 작업실에서는 글이 잘 써지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 안개에 덮인 일산 호수공원. 일산에 작가가 많이 사는 것이 비단 파주 출판도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나는 원고를 쓰겠다고 원주의 토지문화관 같은 조용한 '레지던시'에 들어와선 결국 시끌벅적한 원주의 연세대학교 도서관까지 걸어가 매일 글을 쓰는 작가도 보았다. 소설에서건 현실에서건 작가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존재들인 건 틀림없다.

소설 '태연한 인생'의 주인공 '류'는 한때 '요셉'의 연인이었다. 헤어진 연인인 이 두 사람이 소설 '태연한 인생'의 이야기 축이다. 무책임하고 한순간의 매혹에 쉽게 몸을 던지는 아버지와 입주 가정부 일을 하며 유학 생활을 감내하고 스스로 고독과 고통을 추출해내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류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두 세계 안에서 방황한다. 그러므로 "살아오는 동안 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수많은 증오와 경멸과 피로와 욕망 속을 통과한 것은 어머니의 흐름에 몸을 실어서였지만 류가 고독을 견디도록 도와준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삶에 남아 있는 매혹이었다"는 말은 이 소설의 반복되는 후렴구 같은 것이다. 류는 매혹에 이끌려 요셉을 사랑한다. 하지만 매혹의 끝, 열정의 소실점을 알기에 그를 먼저 떠난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고통이 아닌 고독이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외도를 시작한 아버지를 사랑했던 어머니가 끝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삶의 도피처로.

소설이 특별한 줄거리를 가지는 건 아니다. 실제 이야기는 류와 요셉이 십수년 만에 만날지도 모를 어느 한 날로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속에 많은 과거가 교차돼 있다. 그것은 인간이 나쁜 사랑에 쉽게 매혹되는 건 절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며, 자위야말로 가장 사랑하는 상대와의 섹스라는 독설을 끊임없이 내뿜으면서도 요셉이 어째서 류를 끝내 잊지 못하는지, 그녀가 어째서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아름다운 전경으로 이어진다.

소설을 읽다가 나는 '류'가 약혼자가 자신의 후배와 키스한 사실을 알아채는 장면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긴 여행을 가기로 약속한 이들이 비행기 안에서 손을 맞잡는 순간 그녀가 비로소 어머니의 세계를 이해하는 장면 말이다.

'다른 단계의 인생으로 접어든 것뿐이야. 진짜와 가짜라는 건 없어. 그냥 다른 것이야. 다른 시간과 다른 층위의 방식이 섞이며 흘러가는 것뿐이야. 류의 눈앞에 어머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는 너그러운 적국에 들어가 살게 된 포로 같았다. 그 나라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했지만 그것을 믿지는 않았고 세계가 동일한 적국이었으므로 삶의 부역자일 수밖에 없었다. 류는 창밖을 바라보며 어머니 삶의 해피엔딩에 대해 생각했다. 세계는 고통을 실어나른다. 고통은 관계의 고독이고 고독은 개인됨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둘을 섞었을 때 어머니의 인생은 비로소 납득할 만한 것이 되었다.'

나는 이 소설의 처음이자 모든 것인 마지막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고향을 낯설게 여기는 순간 비로소 문학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는 시인 허수경 시인의 말이 떠오른 건 왜일까.

영하 16도까지 내려가던 혹한의 밤, 어둑한 일산의 카페와 상점들의 거리를 걸었다. 그즈음 결코 태연해질 수 없었던 내게 H가 태연히 이런 말을 했다. 어둠 속에 있으면 어둠 속의 어둠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다고. 어둠을 묵묵히 견딜 수 있다면 그 속에서 기어이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그렇게 슬픔 속의 슬픔, 절망 속의 절망, 기쁨 속의 기쁨을 바라볼 때라야만 부정한 세상을 긍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꼭 잡았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라는 그녀의 마지막 독백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었다.

●태연한 인생: '새의 선물'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등을 쓴 소설가 은희경의 장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