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1월 스물넷 나이로 학업을 중단하고 '파독 광부'로 독일에 갔습니다. 그것이 훗날 영화계에서 평생을 보내게 될 인생의 시작이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죠."
김태우(73) 신영필름 대표가 대학(고려대 경제학과)에 들어간 1960년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이 시작된 해였다. 입학하자마자 '4·19'였고, 이듬해 '5·16'이었다. 군 제대 후 복학하니 한·일 회담 반대 '6·3'시위가 벌어졌다. 나라에 희망이 없어 보였다. 졸업을 세 학기 앞두고 학교를 그만뒀고 새 길을 찾아 파독 광부가 됐다.
대학생에게 탄광 근무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함보른 광산에 배치된 그는 섭씨 36도 지하 막장에서 장화 속에 고인 땀을 몇 번이고 쏟아내며 일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했던 김 대표는 막장 근무 중 가장 힘들고 위험하다는 스템펠(stempel)과 카페(kappe)설치팀에 자원했다. 카페는 막장 끝에서 채탄 기계와 운반 컨베이어를 전진시킬때 막장이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천장에 덧대는 가로받침대이며 스템펠은 카페를 떠받치는 쇠기둥이다. 붕괴의 위험 속에 40㎏이 넘는 육중한 스템펠과 카페를 설치하며 그는 "돈 벌고 기술 배워 조국에 돌아가야 한다" "오직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고 수없이 되뇌었다.
그를 눈여겨본 회사 측이 귀국 1년을 앞둔 1967년 3월 직업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일하면서 공부해 외국인 광부로는 드물게 동료 광부 5~6명을 지도하는 '하우어(Hauer·총괄기술자)' 자격증을 땄다.
그러다가 운명의 순간이 왔다. 매달 광산에선 광부와 직원 대상으로 시청각교육을 했는데 어느 날 '철(鐵)은 살아 있다'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됐다. 역동적인 화면을 보면서 연신 무릎을 치던 김 대표는 "귀국하면 이런 화면을 만드는 영화 촬영 기술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파독 계약기간 3년이 끝날 무렵 뮌헨에 있는 영화 장비 제조회사를 찾아갔다. 최신 영화 촬영용 35㎜ 카메라 '아리플렉스(Arriflex) Ⅱ-C'를 2만마르크 주고 샀다. 광산에서 번 평균 월급 1000마르크(당시 5만원) 중 일부를 고향에 부치고 남긴 돈에서 매달 20마르크만 쓰고 모은 돈이었다.
제조회사 간부는 영화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동양인이 독일에서도 작은 집 한 채는 살 돈을 들고 나타나자 의아해했다. 그러나 김 대표로부터 파독 광부로 육체적 한계에 도전하며 지내온 지난날 이야기와 한국에 돌아가서 펼칠 포부를 듣더니 "6개월 과정 영화 촬영 기술 교육을 무료로 받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1968년 4월 김 대표가 귀국하면서 들여온 독일제 촬영 카메라는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게 '역촬(逆撮)'이 가능했다. 높은 곳에서 사람이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으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첨단 기능이다. 신상옥 감독이 김 대표 카메라를 보더니 큰돈 주고 이를 빌려가 영화를 찍었다.
김 대표는 1969년 9월 영화 촬영장비 대여 및 기술용역 전문회사 '신영필름'을 세우고 정부 정책 동영상을 도맡아 찍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지시한 정책 확인을 위해 '경제동향 보고'라는 이름으로 영상 보고를 요구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포항제철 공장 설립, 소양강댐 건설 등 한국 경제발전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이 김 대표 손에서 나왔다. 1974년 8월 15일 서울지하철 1호선 개통 영상도 그가 찍었다. 하지만 그날 육영수 여사가 변을 당하는 바람에 박 대통령이 보고를 받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상업영화 제작 지원에 진출했다. '쉬리'(1998), '공동경비구역 JSA'(2000), '실미도'(2003), '왕의 남자'(2006), '최종병기 활'(2011),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등 한국 영화사에 남는 흥행 대작 제작에 참여했다. 44년 전 카메라 1대로 시작한 신영필름은 현재 첨단 디지털 촬영장비 100여대를 갖춘 영화 제작 지원 전문회사로 성장했다. 어려움도 없지 않았다. 초기 빚을 냈다가 집을 날렸고, IMF 사태 직전 구입한 장비가 환율 폭등으로 막대한 환차손을 안겼다. 김 대표는 "그때마다 파독 광부로 생활했던 때를 떠올리면서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중단했던 학업을 재개해 입학 48년 만인 2008년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김 대표는 지난해 말 뇌출혈로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았다. 지난 8일 병실로 찾아간 기자에게 그는 파독 광부 시절 받았던 월급명세서, 광부번호가 적힌 신분증, 하우어 자격증 등을 내보이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대표는 "45년간 간직해 온 것"이라며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1968년 새해를 맞아 박 대통령이 파독 광부·간호사들에게 보낸 인쇄본 편지다. "동포들의 꾸준한 노력이 미구(未久)에 알찬 결실을 맺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내용이다.
"살면서 힘들 때마다 이걸 꺼내 읽었어요. 이번에 입원해서도 두 번 읽었고 병상에서 다시 일어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독일에서 흘렸던 땀이 오늘의 나를 만든 힘의 원천입니다. 그때가 없었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