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몸짓과 숨 가쁜 리듬으로 경쟁하는 아이돌 위주 가요시장에서 처연한 통속적 발라드는 시대착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노래만으로 10년 가까이 가요계 정상을 지키고 있는 여가수가 있다. 백지영(37)이다. 어느덧 30대 후반인 그가 최근 발표한 '싫다'(작곡 이루마)는 '20대 군단' 소녀시대의 '아이 갓 어 보이' 못지않은 호응을 얻으며 각종 음악 차트 선두를 다투고 있다. 그는 다음 달 16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7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연다. 3월부터는 전국 투어도 시작한다.

지난 12일 경기도 일산 MBC 드림센터에서 가요 프로 녹화를 앞둔 백지영을 만났다. 그는 "평소 이루마 연주를 좋아했었는데 제 요청에 이렇게 흔쾌히, 빨리 곡을 써줄 줄은 몰랐다"며 "제가 흉성(胸聲)을 잘 쓰는데 거기에 잘 맞는 음역대의 노래가 나와 신기했다"고 웃었다. "둘이 요즘 TV 무대에도 함께 서잖아요. 그래서 더 친해졌는데 (이루마는) 수줍음도, 정도 많은, 유쾌한 허점이 많은 친구예요. 그런데 음악은 참 탄탄해요. 처음 곡을 받았을 때는 '내 목소리가 이 음악을 망치는 게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싫다'는 발라드로 시작되지만 후렴에서 곡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몇 년 전 유행했던 미디엄 템포 스타일로 변신한다. 백지영은 "노래 전반부에 변화의 복선이 전혀 없어 갑작스러운 템포 변화가 더 신선하다"며 "선율이 무척 대중적이라 실험적인 구성에도 팬들이 반기는 듯하다"고 했다.

최근 신곡‘싫다’를 발표하고 활동 중인 가수 백지영. 그는“저도 계속 열심히 노래하겠지만 요즘은 훌륭한 후배를 발굴해 키우고 싶다는 생각도 많다”고 했다.

이날 여러 대기실은 하나씩 자리를 잡은 아이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백지영은 침대가 한쪽에 놓인 아담한 방에서 민낯으로 조용히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어휴, 뭐 조카뻘 되는 아이돌들하고 같이 활동한 지 벌써 8년째잖아요. 처음에는 저 아이들 보면서 나도 예전처럼 무대에서 격렬하게 춤추고 싶다는 열망에 가슴앓이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저한테 맞는 노래를 꾸준히 부르는 게 답이라는 걸 깨닫게 됐죠. 요즘은 그냥 차분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느낌이 좋아요."

백지영은 '대쉬' '새드살사' 등을 히트시키며 댄스 가수로 주목받았던 1999~2000년 신인 시절을 기억하며 "엄정화, 김현정, 이정현, 박지윤 같은 여자 가수들이 주목받고 있을 때 데뷔해 함께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했다. 한때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비디오 사건'을 떠올리면서도 "어쩔 수 없는 휴식이 저한테는 약이었다. 발라드 가수로 변신할 수 있는 내적 성숙을 안겨줬다"고 할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음색에 대해 "특별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대중 곁을 지키면서 그들에게 생활처럼 흡수된 것 같다"며 "제 팬 중에 유독 또래가 많은 것은 그 때문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래도 무대에서 한 가지 원칙은 있어요. 완벽한 몰입이죠. 배우처럼 3~4분짜리 연기를 한다는 생각입니다."

백지영은 드라마 삽입곡(OST)의 여왕으로도 불린다. '시크릿가든' '아이리스' '공주의 남자' 등 숱한 드라마에 스며든 그의 노래는 시청자의 감정을 증폭시켜 왔다. 그는 "대본을 읽어보고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가 마음에 들면 OST 작업에 참여한다"며 "드라마의 결정적 장면에 제 노래가 나오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고 했다. 콘서트에 대해선 "제 음악 인생을 담은, 스토리가 있는 공연을 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