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에 뜬 자그마한 구명정 위에 한 마리의 호랑이와 한 명의 소년이 몸을 실은채 기싸움을 벌인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보는 내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안 감독의 ‘라이브 오브 파이(Life of Pi)’를 보고 뒤통수를 가볍게 한 대 맞은 듯했습니다. 놀랄 만큼 새롭고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흔한 영화들에서 못 만나던 세계를 독특한 스타일로 보여주고 들려주는 점이 돋보였습니다.

난파 사고 때문에 좁은 구명보트 안에 호랑이와 단둘이 살아남아 태평양 바다를 떠돌게 된 소년의 스토리라니! 설정만 들어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하는 궁금증과 기대가 일어납니다. 영화는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스크린엔 227일간 소년이 표류한 망망대해의 풍경이 눈부신 대낮과 신비한 저녁, 환상적인 밤 등으로 변주되며 펼쳐지고, 아무도 다음 장면을 예상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실타래를 풀어놓습니다.

빌딩과 자동차와 수퍼마켓, 아스팔트, 카페를 배경으로 삼아 운전하고, 차 마시고, 밥 먹고, 싸우고, 애정을 나누는 영화에 식상한 관객들에게 ‘라이프 오브 파이’는 새로운 충격입니다. 그 넓은 바다 한가운데에 호랑이와 함께 남아 ‘위험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하는 소년처럼, 따분한 영화에 질려 있던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되면서 완전히 일상을 탈출해 새로운 세계로 한번 들어갔다 나옵니다.

망망대해위에 뜬 구명정에 호랑이 한 마리와 함께 몸을 실은채 수백일간 표류하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소년 파이. 그는 숱한 절망과 고통으로 절규하며 신이라는 존재와 맞닥뜨린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소년 ‘파이’는 왜 그토록 특별한 신세가 됐을까요. 소년의 가족들은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정부의 지원이 끊겨 다른 나라로 떠나게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캐나다에 이민 가려고 동물들을 싣고 화물선을 타고 가던 중 폭풍우에 배가 침몰하자 파이의 가족들은 목숨을 잃고 구명정에 탄 파이만 겨우 살아남게 됐는데 이 배에 하필이면 벵골 호랑이와 동물들이 함께 탄 것이죠.

처음엔 구명정에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같은 동물들도 있었지만, 강자만 살아남는 자연의 법칙대로 결국 호랑이와 파이만 남습니다. 소년은 배에서 발견한 생존 지침서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 알아가며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의 호랑이와 함께 표류를 계속합니다.

이 영화의 진짜 놀라움은 ‘호랑이와 소년의 바다 위 동행’에 있지 않습니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 빛과 그림자와 색채의 놀랍고 신비한 향연과 이 영상들 속에 숨은 음미할만한 상징들이 영화의 알맹이입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시각적 스펙터클로 핵심을 삼는 영화 장르의 원초적인 본질에 충실합니다. 특별한 스토리도 없이 기차의 도착이나 불 끄는 소방관을 필름에 담아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안겼던 출발점의 영화가 그랬듯, 영화의 본질이란 스토리보다도 스크린에 펼쳐지는 역동적 이미지 자체에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줍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의 눈은 더없이 호강합니다. 밤낮을 바다 위에 떠 있는 호랑이와 소년의 기약없는 여정은 두고두고 기억될 이미지들의 퍼레이드입니다. 한밤 신비로운 파란빛으로 빛나는 바닷물에서 춤추듯 도약하는 집채 만한 흰긴수염고래, 밤 바다 위로 푸르스름하게 쏟아지는 수만 개의 별, 신비한 빛을 뿜어대는 해파리떼의 댄스 등 태평양의 야경이 경이롭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망망대해의 표류중 망중한 처럼 찾아온 밤 시간에 바다는 환상적인 빛의 향연을 벌인다.

대낮은 또 어떤가요. 폭풍우처럼 구명정 위의 소년과 호랑이를 덮치는 날치떼들, 표류 중 닿은 어느 작은 섬에서 수천 마리 미어캣들이 개미새끼들처럼 바닥을 나뭇가지를 타고 움직이는 장관…. 여러 대목이 명장면의 반열에 올릴 만합니다. 정점에 이른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도움으로 빚어낸 장관들은 우리가 상상해낼 수 있는 모든 환상을 진짜 눈앞에 펼쳐지는 듯 그려냅니다. 눈 뜨고 꾸는 꿈이고 백일몽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 정도에서 머물렀다면 잘 만든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특별한 맛은 이 별나고 신비로운 스토리라는 껍데기 안쪽에 숨은 또 다른 의미와 상징을 읽는 맛에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생명이 서로 다투고, 때로는 휴전하고, 같이 고생하고, 같이 위험에 빠져 운명을 두려워하며 둘의 ‘진짜 주인’인 신의 처분만 바라는 이야기 속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영적(靈的)인 각성이 깔렸습니다. 소년의 표류란 결국 신의 섭리와, 신의 손길을 깨달아 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이 조난과 표류의 과정은 관객들로 하여금 삶의 본질을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일상을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환상적 영상 체험과 깊은 생각 속으로 관객을 유도하는 테마의 결합이 빚어내는 상승작용이 이 영화의 경이적인 성취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를 그저 맹수와 한 소년의 놀라운 표류기로만 볼 사람들에게도 충분한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것은 상업영화로서 미덕입니다. 액션에 코미디를 섞지 않으면, 코미디에 액션을 섞는 요즈음의 한국 상업 영화 흐름 속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같은 영화는 언제쯤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