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30일 오전 5시쯤 경기도 안성에 사는 신모(71)씨가 아침 운동을 나갔다가 뺑소니 차량에 치여 숨졌다. 사건 발생 2시간 만에 박모(49)씨가 자수했다. 사건은 그대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차량 2대가 신씨를 치고 지나간 것으로 추정된다'는 1차 부검 소견을 내놓았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수사에 나서 지인의 차량정비소에 몰래 차량 수리를 맡긴 손모(29)씨를 사건 발생 5일 만에 검거했다. 알고 보니 손씨의 차량이 신씨를 먼저 쳤고, 이어서 박씨가 쓰러져 있던 신씨를 친 것이었다.
손씨는 범행을 부인했지만, 손씨 차량의 파손 부분과 현장에 남아 있던 부품이 일치한다는 국과수 감정 결과가 추가로 나오면서 손씨는 구속됐다. 경찰 관계자는 "부검이나 차량 감정은 통상 20일 넘게 걸렸다"며 "손씨가 차량 수리를 마쳤다면 범행 입증이 쉽지 않았을 텐데 2주도 안 돼 감정 결과가 나와 사건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결과는 국과수의 감정 속도가 빨라지면서 가능했다. 국과수는 2012년도 12월 31일 기준으로 감정 지연율이 0%를 기록했다고 7일 밝혔다. 이는 지난해 국과수에 접수된 사건 총 30만7000여 건 중 정해진 감정 기일(통상 15일)을 넘겨 감정이 진행 중인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뜻한다. 감정 지연율 0%는 지난 1955년 내무부 소속으로 국과수의 전신인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설립된 이래 5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국과수는 지난해 8월 서울 중랑구 일대에서 연쇄 성폭행·살인을 저지른 서진환 사건 이후 감정 지연율을 낮추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첫 번째 범행 때 현장에서 서진환의 DNA가 확보됐지만, DNA 분석과 대조 작업에 20여일이 걸리면서 두 번째 범행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엔 전남에서 미성년자 2명을 성추행한 강모(67)씨가 도주한 지 1년 2개월 만에 붙잡히기도 했다. 강씨는 법원이 국과수 DNA 감정 결과를 보고 구속영장을 발부하겠다는 방침에 따라 풀려났다가 도주했다. 22일 만에 나온 국과수 감정 결과는 강씨의 성추행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강씨는 이미 도주한 후였다. 이 때문에 국과수 감정이 빨라지는 것은 피의자의 범행 증거 확보가 빨라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번 감정 지연율을 낮추기 위한 시스템 개혁은 추가 예산 투입 없이 진행됐다. 우선 감정 작업을 빨리 수행할 수 있도록 조직과 운영 방식을 개편했다. 국과수 내에서 가장 지연 사건이 많았던 유전자감식센터의 경우 증거물 시료 채취를 1개 팀이 맡아 1주일에 한 번만 하던 것을 팀제 개편으로 매일 1개 팀씩 돌아가면서 하도록 바꿨다. 정보·검색 분야에 있던 10여명을 감정 분야에 추가 배치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가장 높은 지연율을 기록한 문서영상과(53%)는 일과 시간에 연구·개발에 매달리느라 감정 작업이 지체됐었다는 지적에 따라 일과 시간에는 일선 현장에서 의뢰되는 CCTV 화면 분석에 집중하도록 자체 규정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