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점발'이 잘 받는 영험한 신전은 델피신전이었다.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델피에서 꼭 점을 쳤다. 전쟁은 물론이고 헌법 개정 같은 사안이나 농작물 작황, 식민지 운영, 전염병 같은 문제도 신탁을 구했다. 오죽 영험했으면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의 첫 장에도 델피의 신탁이 소재로 등장할 정도였다.
신탁을 묻는 절차는 어떠했는가? '퓌티아'라고 불리는 여자 무당이 영매(靈媒)였다. 영매는 대부분 여자가 맡는다. 퓌티아가 아폴론으로부터 들은 메시지를 접신 상태의 무아지경에서 구두로 전하는 방식이었다. 메시지를 주는 신은 아폴론이었던 것이다. 신전 바닥에는 갈라진 바위 틈새가 있었고, 이 바위 틈새에서는 안개(증기)가 올라왔다고 한다. 다리가 세 개 달린 커다란 솥이 이 바위 틈새에 놓여 있었는데, 무녀(巫女)는 이 솥단지 안에 들어가 안개를 코로 맡으며 신탁을 구하는 사람에게 문답해주는 방식이었다(황태연,'공자와 세계3').
신탁을 물을 수 있는 기간은 1년 중에서 아홉 달이었다고 전해진다. 겨울 석달은 아폴론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겨울방학(?)의 기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을 칠 수 있는 유효기간은 9개월 동안이었고, 점을 치는 날짜도 한 달에 하루뿐이었다. 따라서 1년에 9일만 신탁점을 칠 수 있었다. 신탁은 아무 때나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델피의 신탁은 티오가 많지 않은 매우 귀한 특권이었다. 그러다 보니 신탁을 우선적으로 물을 수 있는 순서가 정해졌다. 델피폴리스와 그 시민이 1순위였고,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2순위, 나중에는 테베가 2순위에 포함되었다.
델피신탁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그 영험함이 소문나기 시작하여 서기 393년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신전이 폐쇄될 때까지 1천년 동안 고대 그리스와 소아시아,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문제는 신탁 해석이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와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애매한 점괘가 많았으므로 그 정확한 의미를 해석해주는 '복관(卜官)'과 '신탁해석가'라는 직책도 있었다. '신탁해석가'는 아테네에서 아주 대접받는 직업이었다고 한다. 이번 대선은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박빙의 승부이다. 필자가 고대 그리스에 살았다면 델피 신전에 달려가서 신탁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입력 2012.12.16. 2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