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 골퍼들에게 한 해의 시작은 12월이다. 골프장에 눈이 쌓이고 그린이 얼어붙은 한국이 아니라 얼마 전 대만에서 개막전을 치른 데 이어 오늘 중국에서 시즌 두 번째 대회가 열린다. 싱가포르에서 2012년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른 게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여자 골프 캘린더는 벌써 2013년 시즌이 개막된 것이다.
이는 인기 좋은 여자 골퍼들의 플레이를 TV를 통해서라도 보고 싶어 하는 국내 팬과 세계 정상급 실력의 한국 골퍼들을 불러들이고 싶어 하는 대만과 중국 골프협회 그리고 스폰서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가능한 일이다. 아직 20대 초반이 대부분인 한국 여자 골퍼들은 참 행복하다. 남자 골프 국내 대회가 한 해 10개 남짓인 데 비해 20개가 넘는 대회를 치르는 여자 선수들에게는 엄동설한에 남국(南國)에서 많은 상금을 딸 수 있는 기회가 또 열려 있다.
미국 여자 프로골프에서 6승을 거두고 올해 은퇴와 함께 결혼한 박지은은 한국에 여자 골프 붐을 몰고 온 대표적인 선수다. 지난 11월 말 결혼을 앞두고 서울 강남에서 만난 그녀는 현역 시절 도도하게까지 느껴지던 이미지와 달리 "저는 정말 까칠한 성격이 아닌데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미국에서 학업과 운동을 병행했던 그녀의 경험담을 듣고 싶어서 초청한 점심 자리였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까지 팬이라고 할 정도로 박지은이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누린 것은 골프 실력 말고도 그녀가 지성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골프 유학을 떠났던 박지은은 고교 시절과 애리조나 주립대학 시절 학업과 스포츠 대회 입상 실적을 합산해서 주는 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골프 훈련은 오전에 하는 달리기를 제외하고는 오후 4~5시 수업을 마친 후에 시작했다. 원래 미국의 학교 스포츠 시스템은 일정한 학점을 받지 못하는 선수는 대회에 참가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 학교들은 튜터링(개인 교습) 시스템을 운영해 스포츠 선수들의 성적 관리에 많은 힘을 쏟는다.
박지은은 "세계 정상을 꿈꾸며 오직 골프 기술 연마에만 매달리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딱 한 가지 '저, 박지은을 봐라'예요"라고 했다. 주니어 시절부터 세계 상위 1% 이내의 실력을 지녔던 박지은이지만 허리 부상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겨우 스물여섯 살 때였다. 프로로서 최고 기량을 보여줄 수 있었던 기간도 5년 남짓했다. 그래서 그는 스포츠 스타를 꿈꾸는 청소년도 나이에 어울리는 학창 생활을 하면서 기량을 닦는 게 장래를 위해 현명하다고 했다. 학교도 이들이 '스포츠 선수이기 이전에 학생'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도록 분위기를 조성할 의무가 있다.
부모까지 나서서 골프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주니어 시절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경쟁을 벌여 살아남은 선수들이 지금 한국 여자 프로골프 무대를 뛰고 있다. "프로 선수로서의 삶은 너무나 짧고, 인생은 정말 길다"고 말하는 박지은의 충고는 골프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