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사업가 라브렌티아디스(40)는 1990년 18세 때 아버지가 경영하던 작은 화학회사를 물려받았다. 그는 2003년 회사를 증시에 상장한 후 금융·제약 등으로 사업 분야를 넓히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지난해 중반 부유층의 자금세탁을 조사하던 금융 당국은 그가 2010년 한 해 동안에만 자신 소유의 은행에서 9억2500만달러(1조원)의 거액을 불법 대출한 것을 적발했다. 이후 검찰 조사 과정에서 그의 성공 뒤에 정치권과의 추악한 결탁과 소위 귀족 가문의 비호가 있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리스 경제 추락의 원인으로 비효율적인 공기업, 무분별한 연금체계, 고임금과 경직된 노동시장으로 경쟁력이 떨어진 산업이 주로 거론된다. 하지만 정치인·언론과 결탁한 유력가문이 불투명하고 폐쇄적인 그리스 경제의 진짜 문제라고 뉴욕타임스가 6일 보도했다. 수십개에 불과한 유력가문이 금융과 조선, 건설 등 핵심 분야를 좌지우지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권과 결탁해 새로운 법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런던정경대의 케빈 페더스톤 교수는 "귀족가문이 정치·언론계와 협잡하다 보면 부패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했다.
라브렌티아디스가 사업을 일군 과정을 보면 그리스 귀족가문 간의 부패 사슬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그는 2005년 오메가라는 이름의 작은 금융회사를 인수한 후 현재 사회당 대표인 베니젤로스의 장인과 파판드레우 전 총리의 동생 등 유력 인사의 친·인척을 이사로 영입했다. 2009년에는 프로톤 은행의 지분도 확보해 경영권을 장악했다.
라브렌티아디스가 소유한 기업의 자금줄 역할을 하던 프로톤 은행은 2009년 유럽 재정위기로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 그러자 당시 재무장관이던 베니젤로스는 파국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1억3000만달러(1400억원)를 프로톤 은행에 지원했다. 하지만 프로톤 은행은 작년 10월 결국 국유화됐다. 라브렌티아디스는 불법 대출 등으로 6500만달러(700억원)의 부당 이익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지만, 그 금액을 내놓는 조건으로 기소를 면했다. 작년 초 그리스 의회는 범죄로 취득한 돈을 배상하면 기소를 면해주는 법을 통과시켰다. 베니젤로스도 그 법안에 서명했다.
라브렌티아디스의 이름은 HSBC은행 스위스 제네바 지점의 고객 명단인 이른바 '라가르드 리스트'에도 등장한다. 불과 며칠 전 이 은행에 예치된 5억5000만유로(7760억원) 계좌의 실소유주가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전 그리스 총리의 어머니라는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일었다.
라브렌티아디스는 "다른 거물들도 라가르드 리스트에 많은데, 왜 하필 내가 표적이 됐느냐"며 "훨씬 더 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수천명 거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채권단은 구제금융 제공 조건으로 그리스에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 지도층이 이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스 정부는 투명성 강화를 공언했지만, 지난 5일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세계부패지수에서 전년보다 14계단이나 하락한 94위로 EU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