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하게 담근 술에 체합니다. 만드는 게 고행이면 마시는 것도 고행이죠."
지난 7일 오후 서울 역삼동의 한 요리 스튜디오에서 이정희(49) '하얀술' 대표가 수강생들에게 누룩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전통주 '쉽게' 만드는 법 강의를 시작했다. "통밀 반죽을 건조 숙성시키면 누룩이란 발효제가 되고, 이것이 쌀을 당화(糖化)시켜 술이 되는 것입니다. 누룩 표면에 곰팡이가 피어나면 띄우기가 거의 끝났다고 보시면 돼요." 볼펜을 꼭 쥐고 필기 준비를 하던 수강생들은 긴장을 풀고 쌀이 술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막걸리 제조법을 능숙하게 시연하는 이 대표는 전통주 전문가지만, 수십년 경력과 노하우를 가졌다는 전통주 명인과는 걸어온 길이 다르다. 오히려 마흔 넘어까지 술에 관심조차 없던 '초짜'였다.
1990년대 이 대표는 '금난새의 해설이 있는 음악회' '뮤지컬 명성황후' 등 대형 공연을 기획하던 베테랑 공연 기획자였다. 장영주·조수미·장한나 등 정상급 클래식 스타들의 공연을 맡기도 했다. 최고가 되기 위해 매진하던 그는 아이들과 함께 보낼 시간도 없는 '일중독자'였다. 바쁜 일정을 쪼개 대학원까지 다니던 1999년, 이 대표는 자궁암 판정을 받았다. 그는 공연 기획자의 길을 접고 요양을 위해 전남 곡성으로 이사했다.
봄이면 매화가 만개하는 섬진강 변 작은 마을은 술 익는 향기에 빠져들기 충분했다. 그는 "술을 마시지는 못하지만 한국에만 있는 불투명한 술, 떠먹는 술, 동물로 만든 술 등 다양한 형태와 색감, 맛을 가진 전통주에 매료됐다"고 했다. 이 대표는 전통주 명인 배상면 선생을 찾아가 제대로 술 제조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 대표는 주찬(酒饌),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양주방(釀酒方),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등 옛 문헌 속 전통주를 찾아 우리 술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배꽃처럼 뽀얗다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는 떠먹는 술 이화주(梨花酒), 이른 봄부터 가을 국화 필 때까지 채취한 100여 가지 꽃을 말려 빚었다는 백화주, 지황·구기자·오가피 등 약재를 넣어 만든 검은 술 지황주(地黃酒) 등 30여 가지 술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2010년엔 이화주의 일종인 전통주를 출시하기도 했다.
그는 "가정에서 담그던 전통주의 맛은 비법도 중요하지만 80%는 재료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좋은 재료로 공들인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쉬운 술이라는 것. 지난 8월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는 술의 기본 원료인 누룩을 손수 만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통주에는 어떠한 인공 감미료도 넣지 않는다. 대신 무농약 쌀, 무환경호르몬 용기를 쓴다. 그는 "좋은 막걸리는 순수 백미로 만들어야 하는데, 웰빙 열풍 틈에 엉뚱하게 현미 막걸리가 나오는 등 술의 기본 원리도 이해 못 한 전통주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고문헌에 등장하는 300여 전통주를 모두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비전문가도 제조 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유튜브에 그 과정을 담을 동영상을 올리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우리 전통주를 누구나 담글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