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철 서울대 의대 교수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제도는 OECD 국가 중 GDP 대비 적은 비용을 쓰고 있음에도 선진국인 미국조차 부러워할 정도로 그 성과는 양호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국민 개(皆)보험 체계를 유지하여 의료 기관의 접근성이 좋으며 여러 중증 질환 치료 성과가 우수한 점이 반영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은 중증 질환과 난치성 질환 치료 과정에서 본인 부담률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이는 건강보험의 실체가 저(低)부담·저급여·저수가 구조로 일관되어 왔으며 경증 질환 진료에 국가 재정이 상대적으로 과잉 투입되어 왔기 때문이다.

대선을 앞둔 요즈음 대선 후보들과 각 캠프에서 내놓은 보건 의료 분야 공약을 보면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있는 보험 재정 확충안은 없고 선심성 정책만 나열되어 있어 안타까운 심정이다. 교육과 보육을 위한 획기적인 지원도 되돌리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의료 서비스는 일단 시작되면 높아진 보장성을 원래 수준으로 되돌릴 경우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의료는 의식주보다도 더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증하는 고령화, 평균 수명 연장 등 사회 현상과 맞물려 건보 재정 지출이 가파르게 상승할 경우 5~6년 후 GDP 대비 국가 채무가 이른바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 4개국 수준으로 악화되는 데 가장 큰 요인이 될 것으로 예견된다. 보험 급여를 확대하더라도 가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중증 질환, 난치성 질환, 만성 질환 등에 최우선으로 지원을 확대하되 어디까지나 점진적으로 시행하면서 재원을 잘 추정하여 감당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정책이어야 한다. 우리 후손에게 엄청난 나랏빚을 떠넘기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다.

증세(增稅) 없이 건보 재정 수십조원을 효율적인 예산 집행 및 절감, 세수(稅收) 누락 방지, 예산 전용 등으로 마련한다는 정책은 사상누각처럼 공허해 보인다. 북유럽의 앞선 국가들이 대표적인 보편적 복지를 시행해 온 국가들이지만, 고소득자에게 70%에 이르는 세금을 부과하여 충당하고 한편으로는 선택적 복지로 전환하는 정책을 병행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점들을 잘 분석하여 국가 재정과 시간을 낭비하고 나라 경제를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먼저 의료인들은 국민 건강의 지킴이로서 유관 단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현 시점에서 어떠한 정책을 가장 앞세워야 하며 중증 질환 진료의 환자 본인 부담을 줄이는 방안이 무엇인지 강구해야 한다. 국회와 정당들도 대국적인 견지에서 토론회와 공청회 등을 시의적절하게 개최하고 의료계를 위시한 유관 단체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귀를 기울이는 기회가 많아야 한다. 기획재정부·보건복지부 등 보건 복지 정책의 책임을 지고 있는 부처나 행정기관은 보편적 복지를 위한 재원 규모, 시행 범위, 시행 시기 등을 예측하여 지속 가능하지 않은 보건 의료 정책에 대해서는 책임 있는 반론을 제기하고 이를 국민에게도 소상히 설명하는 용기와 소신을 견지해야 한다.

만약 2012년 대선의 선심성 보건 복지 정책들이 나라 경제를 기울게 한 과오로 판명 날 경우 단지 5년만을 허송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살리기 위한 국민 총화를 다시 달성하는 데 10년 또는 그 이상 장구한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국민도 이제는 포퓰리즘적인 현혹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현명한 판단을 한다는 것이 사회 여러 분야와 계층에서 감지되고 있는 점이다. 수준 높은 국민이 수준 높은 정부를 만들어 온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희망을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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