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을 버리자, 잘될 거야."
25일 오전 전국스키점프선수권대회가 열린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스키 점프 경기장. 열아홉 살의 국가대표 박제언(19·한국체대 2학년)이 60m 높이의 점프대 위에 앉아 크게 심호흡을 하곤 주문을 외웠다. 그러곤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나서 푸른 잔디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동작 좋고, 거리 좋고!"
막내의 비행(飛行)을 지켜보던 네 명의 형님 국가대표들은 손뼉을 치면서 그를 맞았다.
박제언은 최흥철(31)·최서우(30)·김현기(29)·강칠구(28) 등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 주축인 한국 스키점프 대표팀의 유일한 10대 선수다. 지난 2년간 콘티넨털컵 등 국제대회에서 30위권에 들면서 지난 1월 국가대표로 뽑혔다.
이날 박제언은 K-98(98m 이상을 날아야 감점을 당하지 않는 종목)에서 1·2차 시기 합계 170점을 기록해 김현기를 제치고 4위에 올랐다. K-60(198.9점)과 K-125(121점)에선 형님들한테 밀려 5위를 기록했다. K-60에선 김현기(214.6점), K-98에선 최서우(245.5점), K-125에선 강칠구(200.8점)가 우승을 차지했다. 박제언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아깝다. 그래도 성과는 있다. 김흥수 코치님이 형 한 명이라도 이기면 밥 사준다고 했는데 K-98에서 현기 형을 제쳤다"고 했다.
박제언은 도암중학교 때까지 국내 크로스컨트리 스키의 최고 유망주였다. 1986·1990 동계 아시안게임 크로스컨트리에서 은메달을 딴 아버지 박기호(48)씨를 따라 처음 스키를 시작했다. 아버지와 1988 서울올림픽 여자 하키 은메달리스트였던 어머니 김영숙(47)씨의 운동신경을 물려받은 그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매년 동계 체전에서 전관왕을 차지했다.'스키 천재'란 수식어가 따라붙을 정도였다.
아버지 박기호씨는 "열네 살 때 크로스컨트리 감독이 대표팀에 와서 뛰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다"며 "제언이가 올림픽 메달 등 내가 못 이룬 것들을 이뤄줄 거라 여겼다"고 했다.
그러나 박제언은 아버지의 기대와 다른 길을 걸었다. 상지대관령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스키점프로 전향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스키점프를 처음 해보곤 '계속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을 가졌어요. 아버지는 '계속 크로스컨트리 하면 안 되겠느냐' 하실 정도로 반대했죠."
박제언이 계속 스키점프를 하겠다고 고집하자 아버지도 승낙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허락을 얻는 것보다 실제로 종목을 바꿔 뛰는 일이 더 어려웠다. 지구력과 폐활량이 중요한 크로스컨트리와 날렵한 움직임이 우선시되는 스키점프는 쓰는 근육 자체가 달라 몸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마른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다이어트도 필수였다.
박제언은 "고등학교 때부터 튀김이나 떡볶이 같은 군것질은커녕 끼니마다 밥을 반공기씩밖에 안 먹었다"며 "지금 키 182㎝ 몸무게 69㎏인데 여기에서 한 5㎏ 정도 더 빼야 이상적인 스키점프 선수 몸이 된다"고 했다.
박제언은 악착같은 체중 관리와 혹독한 훈련을 묵묵히 소화했다. 겨울이면 선진 기술을 배우러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스키점프 선진국에서 1~2개월씩 지냈다. 처음에 60m도 겨우 날던 박제언은 입문 2년 만에 110~120m로 비행 거리를 두 배 가까이 늘렸다. 그는 "같이 스키를 탔던 동생 박제윤(18)이 열여섯에 알파인 스키 국가대표가 됐다"며 "'동생한테 뒤지진 말자'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고 했다.
이번 대회는 박제언이 국가대표로 발탁되고 나서 처음으로 치른 실전 무대였다. 그는 지난 5월 K-125 연습을 하다 착지하면서 앞으로 넘어져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올해 일이 잘 풀린다 싶어서 욕심을 내니까 바로 다치더라고요. 두 달 뒤에 다시 점프대에 섰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밑을 내려다보지도 못했어요."
부상으로 인한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 건 대표팀의 둘째 막내 강칠구였다. 똑같은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던 강칠구는 "나도 두려움을 극복해냈다"면서 박제언을 독려했다. 강칠구는 "재능이 있는 동생인데 부상 때문에 제 기량을 못 내는 게 안타까웠다"고 했다.
박제언은 아직 국제 무대에선 '애송이' 수준이다. 올림픽 출전권을 위한 랭킹 포인트를 딸 수 있는 월드컵엔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박제언은 우선 2014 소치 동계 올림픽 개인전 출전권 획득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고 6년 뒤 홈그라운드에서 열리는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각오다. 박제언은 "진짜 앞으로 6년은 죽었다고 생각하고 스키점프에만 매달릴 거에요. 지켜봐 주세요"라고 했다.